※ 이 글에는 영화 <오디세이>의 주요 내용과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어제 토요일 저녁 영화 <오디세이>를 봤다.
극장을 나오면서 뜻밖에도 비트코인이 떠올랐다.
한쪽은 신과 괴물, 왕과 전쟁이 등장하는 수천 년 전 이야기다. 다른 한쪽은 2009년 인터넷에서 태어난 디지털 화폐다. 전혀 다른 두 세계지만 오디세우스의 긴 항해를 따라가다 보면 비트코인이 지난 15여 년간 걸어온 길과 묘하게 겹친다.
오디세우스는 누구보다 영리한 인간이다. 힘으로 뚫을 수 없었던 트로이의 성벽을 트로이 목마라는 계략으로 무력화했다.
비트코인도 그랬다.
은행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중앙은행을 점령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것들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다른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디세이>는 트로이 목마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진짜 이야기는 승리한 다음부터 시작된다.
오디세우스는 전쟁에서 이기고도 10년을 떠돈다. 괴물을 만나고, 동료를 잃고, 죽은 자들의 세계까지 내려간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지략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 오만이었는지를 깨닫는다.
비트코인도 이제 비슷한 질문 앞에 서 있다.
탈중앙화는 인류가 발견한 새로운 질서인가. 아니면 인간이 권력마저 기술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은 또 하나의 오만인가.
금융의 트로이 목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현대 금융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냈다.
거대하고 복잡하게 분산돼 보이던 금융 시스템이 실제로는 소수의 거대한 금융기관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들이 무너지자 민간의 위험은 순식간에 공공의 문제가 됐다.
정부가 개입했다. 중앙은행은 막대한 유동성을 공급했다.
그리고 이듬해 비트코인이 등장했다.
비트코인이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돈에 이렇게 많은 신뢰가 필요한가.
은행 없이 가치를 보낼 수 있다. 중앙관리자 없이 거래 장부를 유지할 수 있다. 통화 공급도 소수의 판단이 아니라 미리 정해진 규칙에 따르게 할 수 있다.
기존 금융의 성벽을 무너뜨리는 대신 돌아가는 길을 만든 것이다.
비트코인은 금융의 트로이 목마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살아남았다.
인터넷 변두리의 실험이었던 비트코인은 이제 세계 금융시장이 무시할 수 없는 자산이 됐다.
트로이 목마는 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괴물은 밖에만 있지 않았다
비트코인이 처음 문제 삼았던 것은 기존 금융의 권력 집중과 불투명성, 도덕적 해이였다.
그런데 비트코인을 둘러싸고 암호화폐 산업이 커지면서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새로운 금융이 자신이 비판했던 옛 금융의 모습을 빠르게 닮아갔다.
과도한 레버리지가 등장했다.
실체가 불분명한 토큰들이 천문학적인 가치를 인정받았다.
내부자들은 일반 투자자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물량을 확보했다. 탈중앙화를 내세운 프로젝트의 의사결정권이 소수 창업자와 투자자에게 집중되는 일도 흔했다.
거래소는 새로운 은행이 됐다.
중개자를 믿지 말자던 사람들이 다시 자신의 자산을 거대한 중개자에게 맡겼다.
FTX의 붕괴는 이 모순을 극적으로 보여줬다.
새로운 기술이 오래된 인간을 바꾸지는 못했다.
이것은 비트코인 자체의 실패와는 구별해야 한다. 오히려 신뢰를 특정 인간이나 기관에 집중하면 위험도 함께 집중된다는 비트코인의 문제의식을 다시 확인시켜준 측면이 있다.
그러나 더 불편한 교훈도 남았다.
중개자를 없애는 것보다 인간이 새로운 중개자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사실이다.
괴물은 바다 건너편에만 있지 않았다.
배 안에도 있었다.
코드의 오만
오디세우스의 약점은 어리석음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영리했다는 데 있다.
자신의 지략이라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신도, 운명도, 바다도 결국 자신의 계산 안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혜가 어느 순간 오만으로 바뀌었다.
암호화폐 세계에도 비슷한 믿음이 있었다.
코드가 제도를 대체할 것이다.
은행은 필요 없어질 것이다.
국가는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규칙을 소프트웨어에 넣으면 인간의 자의적 판단도 사라질 것이다.
'Code is law.'
처음에는 기술적 원칙이었던 이 말은 어느 순간 사회 질서에 대한 철학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블록체인은 거래 기록을 조작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이 거짓말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한다.
스마트계약은 약속을 자동으로 실행할 수 있다.
탐욕을 없앨 수는 없다.
탈중앙화 기술은 권력을 분산시킬 수 있다.
사람들이 새로운 권력자를 만드는 것까지 막지는 못한다.
기술은 인센티브를 바꿀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을 없애지는 못한다.
어쩌면 이것이 비트코인이 마주해야 할 첫 번째 오디세우스적 질문이다.
인간의 문제를 기술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어디까지 혁신이고, 어디서부터 오만인가.
비트코인의 하데스
모든 영웅 서사에는 지하세계가 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하데스가 있었다.
암호화폐 시장에는 2022년이 있었다.
테라·루나가 무너졌다. 대형 대출업체들이 파산했다. FTX가 붕괴했다. 수많은 투자자가 돈을 잃었고, 산업을 대표하던 인물들이 법정에 섰다.
그때 무너진 것은 가격만이 아니었다.
기술적으로 새로우면 경제적으로도 옳을 것이라는 믿음.
'탈중앙화'라는 이름이 붙으면 실제로도 탈중앙화돼 있을 것이라는 믿음.
가격 상승이 곧 혁신의 증거라는 믿음.
그런 환상들도 함께 무너졌다.
하데스에서 돌아온 시장은 조금 달라졌다.
수탁이 중요해졌다.
준비금이 중요해졌다.
회계와 거버넌스가 중요해졌다.
규제 역시 무조건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대상이 됐다.
그리고 가장 역설적인 일이 벌어졌다.
비트코인이 우회하려 했던 기존 금융이 비트코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혁명이 기존 체제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체제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타카에 돌아왔다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이타카로 돌아온다.
하지만 귀환은 승리가 아니었다.
그가 없는 동안 청혼자들이 그의 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재산을 축내고, 아내 페넬로페에게 결혼을 요구하며 마치 왕국이 자신의 것인 양 행동했다.
오디세우스는 집에 돌아왔다.
아직 집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오늘의 비트코인도 비슷하다.
한때 인터넷 변두리의 실험이었던 비트코인은 금융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기관투자가가 사고, 기업이 보유하고, 전통 금융회사가 상품을 만든다.
비트코인은 이타카에 도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청혼자들도 함께 들어왔다.
비트코인의 청혼자들
청혼자를 월가나 정부라고 규정하면 이야기는 쉽다.
하지만 너무 단순하다.
비트코인의 진짜 청혼자는 오히려 그 주변에 쌓인 욕망일 수 있다.
과도한 레버리지.
목적을 잃은 투기.
가격만 오르면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는 믿음.
소수 기관으로 집중되는 수탁.
비트코인을 또 하나의 금융공학 상품으로 만드는 구조.
그리고 비트코인의 존재 이유보다 다음 목표 가격에만 관심을 갖는 문화다.
<오디세이>의 청혼자들은 이타카를 사랑하지 않았다.
이타카에서 무엇을 가져갈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비트코인도 마찬가지다.
금지되지 않아도 실패할 수 있다.
네트워크가 멈추지 않아도 실패할 수 있다.
가격이 100만 달러에 가더라도 실패할 수 있다.
금융적으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철학적으로는 패배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결국 권력이다
비트코인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가격이 아니다.
권력이다.
돈은 누가 통제하는가.
규칙은 누가 바꾸는가.
개인은 중개자 없이 자신의 자산을 소유할 수 있는가.
누군가의 허락 없이 가치를 이동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이것이다.
거대한 경제 시스템에 반드시 왕이 필요한가.
비트코인은 놀라운 답을 내놓았다.
필요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앙관리자 대신 네트워크가 장부를 유지한다. 통화정책도 미리 정해진 규칙에 따른다.
왕을 돈에서 제거해보자는 실험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것을 비트코인의 '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아직 답이 아니다.
질문일 뿐이다.
권력은 돌아온다
탈중앙화는 네트워크 그림으로 그리면 아름답다.
수많은 점이 서로 연결돼 있다.
중앙은 없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은행을 없애면 거래소가 등장한다.
거래소를 없애면 수탁기관이 등장한다.
공식적인 지도자를 없애면 비공식적인 지도자가 생긴다.
권한을 분산하면 더 많은 자본과 정보, 기술과 조직력을 가진 사람이 다시 영향력을 확보한다.
권력에는 이상한 습성이 있다.
흩어놓으면 다시 모인다.
비트코인이라고 예외일까.
채굴은 집중될 수 있다.
수탁도 집중될 수 있다.
부도 집중될 수 있다.
개발에 대한 전문성도 집중될 수 있다.
기관을 통한 접근 역시 집중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비트코인이 중앙화됐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어려운 질문을 피할 수 없다.
권력은 정말 분산될 수 있는가.
아니면 잠시 흩어졌다가 다른 모습으로 다시 모이는 것인가.
이 문제는 블록 하나를 검증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청혼자와의 마지막 싸움
오디세우스는 청혼자들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들을 물리친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의 다음 싸움도 단순히 제도권에 들어가는 데 있지 않다.
제도권에 들어가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기관투자가가 늘어나면서도 수탁 권력의 집중을 피할 수 있는가.
금융상품이 늘어나면서도 비트코인이 레버리지의 담보로만 전락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규제가 확대되면서도 비트코인의 근본적인 무허가성은 유지될 수 있는가.
막대한 자본이 들어오면서도 어느 한 세력이 네트워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가.
이것이 비트코인의 청혼자들과 벌이는 싸움이다.
월가를 이기는 것이 아니다.
월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월가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훨씬 어려운 승리다.
그리고 왕은 떠났다
청혼자들을 물리친 뒤라면 익숙한 영웅담의 결말은 뻔하다.
왕이 돌아온다.
왕좌를 되찾는다.
질서가 복원된다.
하지만 영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오디세우스는 승리했다고 해서 자신에게 영원히 통치할 권리가 생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다음 시대를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넘기고 자신은 떠난다.
비트코인에도 떠난 창시자가 있다.
사토시 나카모토다.
사토시는 비트코인을 만들고 떠났다.
CEO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만들지도 않았다.
비트코인의 왕좌에 앉지도 않았다.
왕좌는 비었다.
일반적인 기업이라면 창업자의 실종은 위기다.
비트코인에서는 오히려 그 부재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됐다.
그러나 사토시는 권력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그 권력이 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그리고 실험을 남겼다.
빈 왕좌는 정말 비어 있을 수 있는가
어쩌면 이것이 <오디세이>와 비트코인이 만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오디세우스가 마지막에 깨닫는 것은 자신의 지략으로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
비트코인도 같은 질문을 마주하고 있다.
창시자를 없앴다.
중앙의 통화관리자를 없앴다.
권력을 네트워크에 분산시키려 했다.
그런데 권력은 계속 돌아온다.
거래소를 통해.
수탁기관을 통해.
채굴자를 통해.
개발자를 통해.
정부를 통해.
금융기관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더 많은 자본을 가진 사람을 통해.
비트코인이 이 힘들을 서로 견제하게 만들면서 어느 누구도 왕이 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성취일 것이다.
비트코인은 단순히 새로운 자산을 만든 것이 아니라, 거대한 경제 네트워크가 중앙의 지배자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하지만 반대일 수도 있다.
탈중앙화는 도달할 수 있는 최종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집중되는 권력과 싸워야 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비트코인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인간 사회의 본모습일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를 무너뜨렸다.
바다를 건넜다.
하데스까지 내려갔다.
이타카로 돌아왔다.
청혼자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그의 긴 여정이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인간이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영리한 인간도 결국 자신의 한계와 마주한다는 것이었다.
비트코인은 금융의 성벽을 넘어섰다.
수많은 괴물을 지나 이타카까지 왔다.
이제 더 어려운 질문이 남았다.
빈 왕좌는 정말 끝까지 비어 있을 수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트코인의 가장 아름다운 이상이 동시에 가장 거대한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왕은 필요 없다는 믿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