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6일 밤 백악관에서 이례적인 대국민 연설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새로 비밀 해제한 정보 문건을 내보이며 중국이 미국 유권자 2억2000만명의 정보를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정당 성향 등 선거에 활용할 수 있는 정보가 중국에 넘어갔고, 미국 정보기관은 이를 알고도 대통령과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의 선거 인프라가 외국의 해킹과 조작에 취약하다며 선거제도 개편을 촉구했다. 백악관도 이를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유권자 정보 침해”로 규정했다.
발표는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충격적인 주장과 입증된 사실은 구분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상당수 주의 유권자 명부가 공개되거나 합법적으로 구매할 수 있다. 공개된 문건에도 중국이 실제 투표용지를 바꾸거나 개표 결과를 조작했다는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미국 정보기관의 기존 평가 역시 중국이 여론과 유권자 정보를 분석했을 가능성은 인정하면서도 투표나 개표 시스템을 기술적으로 조작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AP 등 주요 언론도 트럼프가 공개한 자료가 2020년 대선의 대규모 부정을 증명하지는 못한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트럼프의 주장을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음모론이라고 치부하는 것도 옳지 않다.
중국이 유권자 정보를 확보했다는 것과 실제 선거 결과를 바꿨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침투할 능력이 있다’는 것과 ‘침투했다’는 것도 다르다. 가능성은 증거가 아니고, 의혹은 판결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발표가 던진 질문만큼은 무겁다.
국민은 무엇을 근거로 선거를 믿어야 하는가.
트럼프는 정보기관이 진실을 감췄다고 주장한다. 반대편에서는 트럼프가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확대해 선거 불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비판한다. 한쪽은 “조작됐다”고 외치고, 다른 쪽은 “문제없으니 믿으라”고 말한다.
국민은 다시 둘 중 한쪽을 믿어야 한다.
이것은 검증이 아니다. 정치적 신앙 경쟁이다.
한국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난 6·3 지방선거에서는 전국 140개 투표소로 투표용지가 추가 송부됐다. 이 가운데 91곳에서 추가 용지가 실제 사용됐고, 26곳에서는 투표가 한때 중단됐다. 부족했던 투표용지는 7000장이 넘었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가 1시간 이상 멈췄고, 선관위는 선거가 끝난 뒤에도 사고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진상규명위원회가 내린 결론은 ‘선거 관리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이었다. 위원회는 선관위 수뇌부를 포함한 12명에 대한 수사 의뢰와 실무자 징계를 권고했다. 투표용지가 모자란 것도 문제였지만, 현장 보고와 중앙 통제, 사고 대응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그렇다고 투표용지 부족이 곧 부정선거의 증거라는 뜻은 아니다.
행정 실패와 선거 조작은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선거 관리기관이 사고 규모조차 제때 설명하지 못한다면 의혹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설명이 늦어지고 숫자가 계속 바뀔수록 불신은 커진다. 그때마다 선관위가 “선거 결과에는 문제가 없다”고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신뢰는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토큰포스트는 앞선 사설에서 블록체인이 선거의 만능열쇠는 아니지만, 선거 관리의 취약한 지점부터 단계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선거인명부 관리, 투표용지 인쇄와 배송, 수급 현황, 투표함 이동과 보관, 개표 결과의 교차 검증부터 변경하기 어려운 기록을 남기자는 것이다.
핵심은 투표를 당장 휴대전화로 바꾸자는 것이 아니다.
선거는 실험실이 아니다. 블록체인을 쓴다고 해킹과 조작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유권자의 휴대전화나 인증 장치가 뚫리고 잘못된 정보가 입력되면, 블록체인은 그 잘못을 고스란히 보존할 뿐이다.
먼저 블록체인이 필요한 곳은 투표 행위가 아니라 관리 과정이다.
몇 장의 투표용지가 언제 인쇄됐는지, 어느 투표소로 얼마나 보내졌는지, 누가 인수했는지, 추가 발급은 왜 이뤄졌는지 기록해야 한다. 투표함이 언제 봉인됐고, 누구의 책임 아래 어디로 이동했는지도 여러 기관이 동시에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가 발생한 뒤 선관위가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정당과 시민단체, 보안 전문가와 독립 감사기관이 같은 원본 기록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원칙은 명확하다.
투표는 비밀이어야 하지만, 투표를 관리하는 과정은 투명해야 한다.
AI 시대에는 선거를 위협하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의 선거 개입이 투표함이나 개표기를 노렸다면, 앞으로는 유권자의 판단 과정 자체를 공격할 가능성이 크다. 유권자의 지역과 나이, 직업과 정치 성향을 분석해 사람마다 다른 허위정보를 보낼 수 있다. 실제 후보자가 하지 않은 말을 영상과 음성으로 만들어 퍼뜨리는 일도 어렵지 않다.
중국이 미국 유권자의 개인정보를 확보했다는 의혹이 중요한 이유도 단순한 개인정보 유출에 있지 않다. 그 정보가 AI와 결합하면 유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겨냥한 정교한 정치 공작의 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 광고와 AI 생성 콘텐츠에도 추적 가능한 기록이 필요하다. 누가 만들었고, 누가 돈을 냈으며, 어느 계정을 통해 얼마나 확산됐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플랫폼은 정치 광고 구매자와 집행 금액, 노출 대상을 공개해야 한다.
표현을 막자는 것이 아니다. 익명 뒤에 숨어 민주주의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를 바꾸자는 것이다.
최근 미국 보수 진영 일각에서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유권자의 자격 문제로 돌리는 주장도 나온다. 사회에 해를 끼치거나 올바른 판단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정치 참여를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에서 책임이 사라지면 공동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문제의식 자체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해법이 특정 국민의 투표권을 빼앗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누가 현명한 유권자이고 누가 위험한 유권자인지를 국가가 결정하기 시작하면, 국민이 권력을 선택하는 민주주의는 끝난다. 대신 권력이 자신을 선택할 국민을 고르는 체제가 시작된다.
민주주의의 문제는 너무 많은 사람이 투표하는 데 있지 않다.
너무 많은 권력과 정보가 검증되지 않은 채 행사되는 데 있다.
유권자에게는 현명하게 판단하라고 요구하면서 국가기관에는 무조건 믿어 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 시민의 한 표보다 권력자의 명령, 플랫폼의 알고리즘, 정보기관의 판단이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더 무거운 책임은 더 큰 힘을 가진 쪽에 물어야 한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결제 시스템이다.
금융 거래에서 장부가 맞지 않으면 시장이 멈춘다. 선거에서 기록을 믿을 수 없게 되면 공동체의 합의가 멈춘다. 선거에서 패배한 쪽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승리한 쪽마저 정당성을 의심받게 된다.
트럼프의 폭로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정치인의 연설과 선거기관의 해명만으로 국민을 설득하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 민주주의도 증명해야 한다.
투표권은 넓게, 관리 과정은 투명하게, 기록은 검증 가능하게.
한국이 미국의 혼란에서 배워야 할 것은 특정 정치인의 주장이 아니다. 어떤 정치인도 선거 불신을 마음대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일이다.
블록체인은 민주주의를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거짓말하기 어렵게 만들 수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