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 확인, 매번 다시 해야 할까?”…a16z crypto 리서치, 온체인 금융의 ‘재사용 KYC’ 해법 분석
전통 금융의 온체인 진출을 가로막는 고객확인(KYC)의 중복 절차를 줄이기 위해 검증 결과를 재사용하는 신원 인증 체계가 대안으로 제시됐다. a16z crypto 리서치(a16z crypto research)의 매기 슈와 미셸 코버는 2026년 10월 13일 보고서에서 ‘재사용 KYC’와 디지털 자격증명을 활용하면 개인정보 노출과 반복 검증 비용을 줄이면서 탈중앙화 금융(DeFi)의 기관 참여를 확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핵심 과제로는 검증기관 간 신뢰 기준과 법적 책임의 명확한 배분을 꼽았다.
KYC는 금융기관이 자금세탁과 테러자금 조달을 방지하기 위해 고객의 신원을 확인하는 절차다. 기존 금융에서는 기관마다 고객 정보를 수집하고 검증 기록을 별도로 보관한다. 고객이 다른 은행이나 거래소를 이용하면 이미 제출한 신분증과 개인정보를 다시 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자산이 여러 지갑과 프로토콜을 오가는 온체인 환경에서는 이러한 반복이 서비스 이용 지연과 운영비 증가로 이어진다.
보고서는 규제 준수의 출발점을 ‘책임의 범위’에서 찾았다. 은행의 고객 신원 확인 의무는 해당 은행의 고객을 대상으로 하며, 거래를 처리하는 블록체인의 모든 참여자에게 자동으로 확대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은행 고객과 거래하거나 은행이 유동성을 공급하는 풀을 이용한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은행의 고객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기관은 자체 고객과 거래에 필요한 통제를 설계하면서 온체인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다고 봤다.
재사용 KYC는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이 수행한 검증 결과를 다른 서비스에서도 활용하는 방식이다. 개인정보를 여러 사업자에게 반복 제출할 필요가 줄어들면 데이터 유출과 신원 도용의 위험도 낮출 수 있다. 보고서가 제시한 전통 금융의 참고 사례는 스위프트의 KYC 레지스트리다. 2014년 출시된 이 서비스는 보고서 기준 200개국 이상, 약 8,000개 기관을 포괄한다. 은행이 서류를 한 번 올리면 필요한 거래 상대방과 공유하는 구조로, 주로 기관 간 신원 확인을 지원한다.
암호화폐 시장에서는 검증 정보를 연결하는 다양한 서비스가 등장하고 있다. 파이어블록스의 오픈 트랜잭션 레이어(OTL)는 네트워크에 참여한 규제 대상 기관이 확인한 고객 상태를 다른 참여자가 활용하도록 공유 프로토콜을 제공한다. 프리바도 ID는 발급기관이 만든 디지털 자격증명을 사용자 지갑에 보관하고 필요한 서비스에 제시하는 방식을 지원한다. 보고서는 일부 신뢰 네트워크에서 최초 기본 검증에 건당 1~2달러가 들 수 있지만, 후속 플랫폼이 필요한 항목만 추가 확인하면 고객당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기술적으로 검증 결과를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법적 책임의 이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a16z crypto 리서치의 매기 슈와 미셸 코버는 외부 업체에 신원 확인 업무를 맡기는 ‘위탁’과 규정상 요건을 갖춘 금융기관의 검증에 ‘의존’하는 구조를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반적인 신원 확인 업체를 이용하더라도 고객 신원 확인 프로그램(CIP)의 요건을 충족할 책임은 금융기관에 남는다는 설명이다.
보고서가 인용한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의 제3자 의존 원칙도 이러한 책임 구조를 전제로 한다. 검증을 수행하는 제3자는 관련 규제와 감독을 받아야 하고, 의존하는 금융기관은 요청 시 기초 고객확인 자료에 즉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최종 책임 역시 의존하는 기관이 부담한다. 개인정보 공개를 최소화하려는 온체인 설계와 조사에 필요한 원자료 접근성을 어떻게 함께 확보할지가 재사용 KYC 확산의 관건이다.
기술적 해법으로는 ‘검증 가능한 자격증명’과 ‘영지식 증명’이 제시됐다. 신뢰받는 발급기관이 고객의 신원을 확인한 뒤 디지털 서명 자격증명을 발급하면, 사용자는 이를 보관했다가 다른 애플리케이션에 제출할 수 있다. 영지식 증명은 기초 개인정보 전체를 공개하지 않고도 연령이나 특정 자격의 충족 여부를 입증하도록 돕는다. 다만 이러한 증명이 복잡한 자금세탁 조사나 위험 판단을 모두 대체할 수는 없으며, 정보를 받는 기관의 검증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지갑과 신원을 연결하는 과정에도 보완 장치가 필요하다. 양도 불가능한 소울바운드 토큰은 검증 결과를 특정 주소에 기록할 수 있지만, 지갑 통제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상황까지 차단하지는 못한다. 보고서는 자격증명의 만료와 취소, 신원과 주소의 연결 상태를 갱신하는 기능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사람이 중복 등록 없이 참여했는지 확인하는 인격 증명 역시 법적 신원 확인과는 역할이 달라 다른 검증 수단과 결합해야 한다고 봤다.
온체인 규제 준수는 고객 신원 확인 이후에도 이어진다. 지갑 확인(KYW)은 주소를 통제하는 주체와 이용 자격을 살피고, 자산 확인(KYA)은 자산의 출처와 보유·이전 조건을 점검한다. 거래 확인(KYT)은 지갑 사이의 자금 흐름과 의심스러운 활동을 추적한다. 보고서는 체이널리시스와 엘립틱, TRM 등 분석업체가 온체인·오프체인 정보를 결합해 금융기관의 지속적인 거래 모니터링을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토큰이나 애플리케이션에 접근 조건을 내장하는 방식도 활용할 수 있다. 보고서는 솔라나(SOL)의 전송 훅을 발행사가 토큰 이전 조건을 검사하는 수단으로, 유니스왑(UNI) v4의 훅을 특정 풀에 맞춤형 접근 규칙을 적용하는 수단으로 소개했다. 이 경우 통제가 적용되는 범위는 개별 자산이나 풀이다. 전체 네트워크를 허가형으로 바꾸지 않고도 상품에 필요한 조건을 구현할 수 있다는 의미다. 체인 간 자산 이동에서도 검증 상태를 전달하려면 공통 표준과 정보 연동 체계가 필요하다.
다음 과제로는 AI 에이전트의 신원과 권한을 검증하는 ‘에이전트 확인’이 부상했다. 고객을 대신해 결제하거나 자산을 관리하는 소프트웨어에는 누가 권한을 부여했는지, 어떤 행동을 허용했는지, 지출 한도는 얼마인지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하다. 보고서는 구글의 에이전트 결제 프로토콜(AP2)이 서명된 위임장으로 구매 조건과 지출 한도를 기록하는 사례를 제시했다. 고객을 식별하는 절차에서 나아가 위임 관계와 권한의 한계를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a16z crypto 리서치의 매기 슈와 미셸 코버는 금융기관이 기존 규제 준수 프로그램에 디지털 신원 도구를 연결하는 데서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재사용 KYC가 온체인 금융의 기반으로 자리 잡으려면 자격증명의 신뢰성과 최신성, 필요한 정보에 대한 접근성, 사고 발생 시 책임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 검증 결과의 활용 범위를 넓히면서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 DeFi와 전통 금융의 접점을 확대할 핵심 과제다.

이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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