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자 전환사채 발행액이 올해 720억 달러(약 96조원)에 이르며 지난해 연간 기록에 근접했다. AI 인프라 투자에 필요한 자금이 커지면서 기업들이 이자 부담을 낮춘 조달 수단으로 전환사채를 활용한 결과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딜로직(Dealogic) 자료를 토대로 2026년 들어 글로벌 시장에서 발행된 제로쿠폰 전환사채가 720억 달러로 집계됐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연간 발행액은 730억 달러였고, 올해 전체 전환사채 발행에서 무이자 전환사채가 차지한 비중은 41%로 나타났다.
전환사채는 일정 조건에서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채권이다. 투자자는 채권을 보유하다가 주가가 전환가격을 넘으면 주식 전환을 선택할 수 있고, 발행 기업은 일반 회사채보다 낮은 이자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무이자 전환사채는 정기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대신 주식 전환권의 가치를 전면에 둔 구조다. 투자자는 이자 수익보다 향후 주가 상승에 따른 전환권 가치를 보고 채권을 사들이는 셈이다.
AI 관련 기업의 자금 수요가 발행 증가를 이끌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온세미컨덕터(ON Semiconductor)와 시에나(Ciena) 등이 수십억 달러 규모의 무이자 전환사채를 발행했다고 전했다.
클라우드플레어(Cloudflare)와 앰코테크놀로지(Amkor Technology)도 캡트콜 구조를 활용한 대형 거래 사례로 거론됐다.
캡트콜은 주가가 전환가격을 넘은 뒤 일정 수준까지 오를 경우 계약 상대 금융사가 지분 희석분을 현금이나 주식으로 보전하는 구조다. 전환사채 발행 기업은 기존 주주의 희석 부담을 낮추고, 투자자는 전환권을 통해 주가 변동성에 노출된다.
올해 캡트콜이 붙은 채권 발행액은 680억 달러(약 93조1000억원)로 집계됐다. 캡트콜은 기업 입장에서는 주식 전환에 따른 희석 우려를 낮추는 장치지만, 계약 비용과 전환 조건이 함께 작동하기 때문에 실제 조달 부담은 거래 구조에 따라 달라진다.
니콜라 크레미외(Nicolas Crémieux) 미라보자산운용 전환사채 담당자는 “현재 시장에 진입하는 AI 기업은 과거 발행사보다 변동성이 훨씬 크다”고 말했다. 주가 변동성이 커질수록 전환권 가치가 높아져 발행 기업이 쿠폰 금리를 낮출 수 있다는 설명이다.
미라보자산운용은 8월 5일 보고서에서 AI 관련 발행사가 글로벌 전환사채 시장의 30% 이상을 차지한다고 밝혔다. 엔비디아(Nvidia)나 대형 하이퍼스케일러 자체보다 인프라, 소프트웨어, 데이터 관리 기업이 전환사채 시장의 AI 노출을 형성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금리 환경도 영향을 줬다. 미국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올해 연 4.15%에서 4.66%로 상승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고정 이자를 지급하는 일반 회사채보다 전환사채를 통해 조달 비용을 줄일 유인이 커졌다. 다만 무이자 전환사채는 향후 주식 전환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만큼, 기존 주주에게는 지분 희석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국내 시장에서도 무이자 전환사채는 설비 투자와 운영자금 조달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본지는 앞서 KX하이텍이 표면금리와 만기보장수익률을 모두 0%로 정한 전환사채를 발행한다고 보도했다.
전환사채 시장의 확대는 AI 투자 열기와 금리 부담이 동시에 반영된 흐름으로 풀이된다. 발행 기업의 조달비용 절감 효과와 기존 주주의 희석 부담, 캡트콜 비용이 함께 맞물리는 만큼 개별 거래의 조건을 함께 봐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