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들이 로봇과 인공지능(AI) 등 첨단 산업의 글로벌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가운데, 복잡하고 중첩된 규제가 오히려 혁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기업들이 기술을 개발하고도 각종 인증과 노동 규제, 현장 적용의 어려움으로 인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11월 21일 정부에 총 238건에 달하는 규제혁신 과제를 건의했다고 밝혔다. 이 과제들은 행정 편의적 규제, 노동 규제, 환경·안전 규제, 기업 경영 규제, 현장 애로 개선 등 다섯 가지 분야로 나뉘어 있다. 특히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산업일수록 인증 절차나 인력 운영에 있어 과거 산업구조 기준의 규제를 그대로 적용받는 경우가 많아, 기업들이 제약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로봇산업의 경우, 국제 인증을 이미 받은 제품조차 국내에서 비슷한 항목에 대해 다시 인증을 받아야 하며, 일부 부품을 교체하거나 업그레이드했을 때도 안전 인증을 처음부터 다시 받아야 한다는 불만이 제기됐다. 경총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복 인증 절차를 간소화하고, 로봇 관련 정책을 총괄할 정부 내 전담 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노동 규제 분야에서도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특히 AI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기업들은 긴 시간 집중 연구가 필요하지만, 현재 산업안전보건법상 특별연장근로가 허용되지 않아 인력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반도체 산업처럼 연구·개발직에 대한 예외적 근로 허용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 밖에도 제조업 인력난 완화를 위한 외국인 근로자 고용 확대와 관련한 제도 개선도 함께 제안됐다.

환경·안전 관련 규제 역시 현장 적용의 탄력성이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부각됐다. 예컨대 반도체 작업장처럼 위험물질을 소량 보유하더라도 동일한 안전 기준을 적용받는 현실이 오히려 과도하다는 것이다. 업계는 취급량과 위험도를 고려한 차등 규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더해 건물용 수소 설비의 지하 설치 금지 조항 등도 기술발전을 반영한 유연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기업 경영과 현장 운영과 관련해서는 산업단지 내 업종 제한이나 설비 설치 제한, 주주총회의 우편통지 의무 등 디지털 전환 시대에 맞지 않는 구시대적 규정들이 언급됐다. 경총은 이러한 규제들이 실제 기업 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만큼, 디지털 문서 전환 및 병역 대체 복무 대기업 확대 등 현실 반영형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번 경총의 대규모 건의는 단발성 제안에 그치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글로벌 환경에서 국내 기업들이 경쟁력을 유지하고 혁신을 지속하려면, 규제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필수라는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 정부가 이 같은 건의를 수용해 실질적인 제도 개선에 나선다면, 한국 첨단 산업의 성장 토대 마련이 한걸음 앞당겨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