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이란 정권과 연계된 암호화폐 약 10억 달러(약 1조 3,700억원)를 압수했다고 공식 확인했다. 암호화폐 국가 제재 회피의 핵심 통로로 떠오른 가운데, 미 재무부가 블록체인 지갑을 직접 '낚아채는' 방식으로 자금을 동결한 사실상 사상 최대 규모의 암호화폐 제재 집행이다.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은 지난 29일(현지시간) 레이건 국가경제포럼에서 진행된 폭스비즈니스 '커들로' 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베센트 장관은 "우리는 지갑을 통째로 낚아챘다"며 "그들 중 일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거래소에) 입력을 하면서, 자기 지갑이 이미 압수됐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Bessent on Iran:
— Clash Report (@clashreport) May 29, 2026
We have seized about $1 billion of Iran's crypto — just outright grabbed the wallets.
Some of them may be typing in right now and might not realize their wallet has been grabbed.
This is money that's stolen from the Iranian people. pic.twitter.com/h3ycrJn1Jy
■ 4월 5,000억원에서 한 달여 만에 두 배로
이번에 발표된 10억 달러는 단일 압수액이 아니라 그동안 누적된 총액이다. 4월 말 기준 누적 압수액은 약 5억 달러였다. 한 달여 만에 압수 규모가 두 배로 불어난 셈으로, 미 재무부의 제재 집행 속도가 최근 수 주 사이 급격히 빨라졌음을 보여준다.
특히 지난 4월에는 트론(Tron) 블록체인 위에서 발행된 테더(USDT) 3억 4,400만 달러가 동결됐다. 이 작전들은 모두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의 제재 회피망을 겨냥해 추진 중인 '경제적 분노 작전(Operation Economic Fury)'의 일부다. 이는 2월 말 미국·이스라엘이 이란 핵시설을 타격한 군사 작전 '서사적 분노 작전(Operation Epic Fury)'과는 별개의 경제 캠페인이다.
베센트 장관은 이란이 제재 압박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매달 4억~5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암호화폐 경로로 움직였다고 추정했다. 미 재무부는 테더 등 발행사 및 블록체인 분석업체와 협력해 이란 연계 지갑을 식별하고 동결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 "이란 국민에게서 훔친 돈"…명분과 현실 사이
베센트 장관은 압수 자산이 "이란 국민을 대신해" 보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란 정권이 국민의 돈을 빼돌렸으며, 미국은 그 돈을 되찾아 보관하고 있을 뿐이라는 논리다. 그는 유럽 동맹국들과 협력해 이란 당국자와 혁명수비대(IRGC) 인사들이 보유한 해외 별장·부동산·역외 계좌까지 추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베센트 장관은 제재의 효과를 두고 "이란군의 40~50%가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고, 경찰은 출근하지 않으며, 인플레이션은 200%를 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 수치는 베센트 장관 본인의 발언으로, 독립적으로 검증된 통계는 아니다.
그러나 암호화폐 이란 정권의 도구이기 이전에, 평범한 이란 국민에게는 생존의 동아줄이었다는 점은 이번 압수 작전이 안고 있는 그림자다. 전체 인구의 약 6분의 1이 암호화폐을 이용하는 이란에서, 시민들은 90% 가까이 폭락한 리알화 가치와 연 40~50%의 살인적 물가, 시위 때마다 반복되는 정전과 인터넷 차단을 피해 비트코인과 USDT 같은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으로 자산을 지켜왔다. 마치 외환위기 시절 한국 가정이 장롱 속에 달러를 숨겨두던 것과 같은 본능적 방어였다.
물론 같은 시스템은 정권의 무기로도 변질됐다. 혁명수비대 연계 주소가 받은 자금은 2024년 20억 달러에서 2025년 30억 달러 이상으로 늘었고, 이란 전체 암호화폐 유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연말 50%를 넘어섰다.
■ '코드는 법'이라던 자기수탁(Self-Custody) 신화의 시험대
이번 사건이 한국 디지털 자산 업계에 던지는 함의는 분명하다. 첫째, "내 지갑의 자산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자기수탁의 신화가 처음으로 국가 권력 앞에서 시험대에 올랐다는 점이다. 베센트 장관의 "지갑째 낚아챘다"는 표현은 결국 발행사 차원의 동결과 거래소·온램프 길목 차단을 통해 사실상 자산을 무력화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탈중앙을 표방하는 자산이라도, 그 자산을 현실 경제와 연결하는 '관문'이 중앙화돼 있는 한 완전한 검열 저항은 환상에 가깝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둘째, 표적이 다름 아닌 트론 기반 USDT였다는 사실이다. 글로벌 제재 회피 자금의 주된 통로가 특정 스테이블코인 네트워크에 집중돼 있다는 점은, 한국이 추진 중인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에서도 발행사의 동결 권한과 자금세탁방지(AML) 설계가 출범 단계부터 핵심 쟁점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스테이블코인은 이제 단순한 결제수단을 넘어 '제재의 무기'이자 '지정학의 도구'로 그 성격이 확장되고 있다.
미 재무부는 향후 수개월간 OFAC의 지갑 지정과 자산 몰수를 더욱 공격적으로 이어갈 방침이다. 다만 경제 압박을 통해 이란 내 반정부 봉기를 유도하려는 워싱턴의 구상은, 1월의 일시적 소요를 제외하면 아직 현실화되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