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 코인 이후의 금융 실험…DeFi는 ‘신뢰’를 설계할 수 있을까

금융 시스템을 지탱하는 핵심은 ‘신뢰’다. 전통 금융은 법, 제도, 회계 및 감사 체계를 통해 이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반복된 금융 사고는 기존 시스템의 신뢰 기반이 충분하지 않다는 문제를 드러냈다.

이에 DeFi(탈중앙화금융)와 블록체인 기반 회계 시스템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 시스템은 신뢰를 사람이나 기관이 아닌, 설계된 코드와 알고리즘에 의존하는 구조로 재구성한다. 이는 금융 신뢰를 기술적으로 구조화하려는 접근이며, 새로운 금융 질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왜 지금인가…기술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블록체인과 스마트컨트랙트는 이미 10년 이상 존재했지만, 금융 구조를 실제로 재편할 수단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 몇 년이다.

첫째, 반복된 신뢰 실패가 기술을 ‘보완재’가 아닌 ‘대안’으로 인식하게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2008), 와이어카드 회계 사기(2020), FTX 거래소 붕괴(2022)는 공통적으로 회계 조작, 내부 통제 실패, 정보 비대칭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냈다.

둘째, 스테이블코인의 성공은 기술 기반 신뢰 형성의 실증 사례다. 테더(USDT), 서클(USDC)는 발행·소각 내역이 스마트컨트랙트로 실시간 추적되고, 준비금도 공개된다. 이들은 2024년 기준 시가총액 2,000억 달러를 넘기며 DeFi, 글로벌 송금, 상거래 등에서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

왜 블록체인 회계인가

전통 회계는 기록과 검증을 인간에게 의존했다. 회계사는 장부에 수치를 기록하고, 감사인은 이를 검토한다. 그러나 엔론, 와이어카드, FTX 사태에서 이 방식의 취약점은 여실히 드러났다. 기록은 있었지만, 이를 객관적으로 검증할 구조는 없었다.

블록체인 기반 회계는 이와 다른 접근을 제시한다. 거래 내역은 변경 불가능한 장부에 실시간 기록되며, 조건 충족 시 자동 실행된다. 거래 시점, 조건, 자산 이동 내역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누구나 동일한 데이터를 검증할 수 있다.

이 구조는 기존 회계의 이중기장(double-entry)을 넘어, 블록체인에 제3의 공통 장부를 남기는 삼중기장(triple-entry)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거래를 기술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근거로 남기며, 외부 감사 없이도 진위 확인이 가능하다. 또한 거래가 실시간으로 기록·검증되는 지속 감사(continuous auditing) 구조 구현도 가능하다.

이는 회계와 공시, 규제, 감시 없이도 작동하는 신뢰 구조로 전환하는 시도다.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는 구조적 접근

금융의 핵심 문제 중 하나는 정보 비대칭이다.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의 예다—일부 고객만 정보에 접근한 채 대규모 인출이 일어났다.

디파이(DeFi)는 이 구조를 바꾼다. 자산 담보, 수익률, 상환 조건이 모두 블록체인에 기록되며, 누구나 동일하게 정보를 접할 수 있다. 핵심은 ‘누군가를 믿지 않아도 되는 구조’가 구성된다는 점이다.

신뢰는 공시가 아니라 코드다

기존 금융은 신뢰를 브랜드, 제도, 사람에게 맡겼다. 그러나 반복되는 사고는 이 믿음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줬다.

DeFi는 신뢰를 코드로 전환한다. 자동 청산, 자동 배분, 자동 회계 등을 스마트컨트랙트로 실행하며, 모든 과정이 블록체인 상에 공개된다. Aave는 담보 비율이 일정 수준 이하로 내려가면 자동 청산되고, MakerDAO는 DAI 발행과 담보 관리를 코드로 자동 처리한다. 시스템은 사람 없이도 작동하며 누구나 검증할 수 있다.

구조적 신뢰의 전환점, 디파이화 (DeFi-ization)

우리는 지금 금융 신뢰 구조가 변하는 전환점에 서 있다. 기존 시스템은 중앙 권위와 감독 기관에 의존했지만, DeFi는 이 구조를 수학과 코드로 대체한다. 신뢰가 제도와 사람이 아닌, 조건의 충족과 공개성에 기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민주화라기보다 탈권위적 신뢰 설계의 실험이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도전이 아니라 하나의 본질적 질문이다.
“사람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을 믿을 것인가?”

금융을 넘어 정치, 사법, 행정 등 사회 전반의 신뢰 구조에 적용되는 질문이다. 신뢰가 코드 상에서 작동한다면, 법과 책임은 어떻게 재설계돼야 할까?

그러나 기술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이 구조가 현실 시스템으로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코드 취약성, 해킹 리스크, 예외 처리, 법적 정합성 등이 그것이다. 알고리즘이 윤리보다 정확하다고 해서 사회적 신뢰 전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DeFi가 제시하는 것은 답이 아닌, 가능성이다. 신뢰는 더 이상 전제가 아니다. 설계될 수 있는 변수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이미 작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