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시장의 변동성을 회피하기 위한 도구로만 여겨졌던 스테이블코인이 ‘돌이킬 수 없는 지점(Point of No Return)’을 지났다. 스테이블코인은 이제 단순한 트레이딩 칩을 넘어 인터넷 경제의 새로운 기축 통화(Monetary Base)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바이낸스 리서치가 발표한 ‘스테이블코인 비즈니스(The Stablecoin Business)’ 보고서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의 시가총액은 2025년 10월 기준 3,000억 달러(약 420조 원)를 돌파했으며 , 일일 거래량은 3조 1,000억 달러에 육박해 글로벌 결제 공룡 비자(Visa)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7조 3,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 자동결제시스템(ACH)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거래 규모로, 스테이블코인이 이미 실질적인 글로벌 금융 인프라로 기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 투기 수요 압도한 ‘실사용’… 사용자 88%는 트레이딩 안 해
과거 스테이블코인은 주로 암호화폐 투자를 위한 예치금 성격이 강했으나, 현재는 그 용도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바이낸스 리서치 조슈아 웡(Joshua Wong) 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바이낸스 월간 활성 사용자 중 단 12%만이 트레이딩에 집중하고 있으며 , 나머지 88%는 결제(Pay), 환전(Convert), 이자 수익(Earn) 등 비투기적 유틸리티 목적으로 플랫폼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스테이블코인의 효용성이 투기적 수요를 압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지표로, 단순한 투자 자산에서 디지털 경제의 필수 통화로 진화했음을 의미한다.
■ 인프라 전쟁의 서막… 4단계 ‘스택’ 장악 나선 공룡들
이러한 시장의 폭발적 성장에 발맞춰 글로벌 기업들은 발행사, 네트워크, 인프라 제공자, 소비자 애플리케이션으로 이어지는 ‘스테이블코인 4단계 스택(Stack)’의 전 영역을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다. 보고서는 주요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영역을 넘어 수직 계열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테더(Tether)와 서클(Circle)은 각각 플라즈마(Plasma)와 아크(Arc)라는 자체 결제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전통 핀테크 기업의 공세도 거세다. 스트라이프(Stripe)는 11억 달러(약 1조 5천억 원)에 스테이블코인 인프라 기업 브리지(Bridge)를 인수하며 시장 선점에 나섰고 , 코인베이스 역시 결제 인프라 확장을 위해 BVNK를 약 20억 달러 규모에 인수 추진하는 등 전통 금융과 암호화폐 기업 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서비스 확장이 아니라 차세대 비자(Visa)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그리고 머니마켓펀드(MMF)의 기능을 통합한 거대 금융 플랫폼이 되기 위한 패권 다툼으로 해석된다.
■ B2B 결제 50배 폭증… 기업 금융의 ‘뉴 노멀’
특히 주목할 점은 기업 간 거래(B2B) 결제 시장에서의 급격한 성장세다. 2025년 기준 스테이블코인 결제 규모는 100억 달러를 넘어섰는데, 이 중 B2B 결제 규모는 2023년 1월 대비 무려 50배 이상 급증하며 전체 거래량의 약 63%를 차지하고 있다.
회계법인 EY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62%가 국경 간 공급망 대금 결제에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하고 있으며, 53%는 해외 기업 간 결제 수취에 이를 활용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는 스테이블코인이 더 이상 개인 투자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기업의 비용 절감과 효율성을 위한 필수적인 기업 금융 인프라로 자리 잡았음을 방증한다.
■ 규제의 분화: ‘디지털 현금’과 ‘수익형 자산’의 갈림길
스테이블코인의 구조적 진화는 필연적으로 규제의 분화를 불러오고 있다. 시장은 크게 이자를 지급하지 않고 결제 수단으로 활용되는 ‘지급용 스테이블코인(Payment Stablecoins)’과 국채 등을 담보로 수익을 제공하는 ‘수익형 달러(Yield-Bearing Dollars)’로 양분되고 있다.
미국 국채를 100% 준비금으로 보유하는 스테이블코인의 특성상, 이들이 은행 예금을 흡수할 경우 기존 은행의 대출 능력과 신용 창출 기능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에 따라 ‘지니어스 법(GENIUS Act)’과 같은 규제안은 지급용 코인을 디지털 현금으로, 수익형 코인은 증권(투자 계약)으로 분류하여 관리하는 투트랙 전략을 구체화하고 있으며, 이는 향후 10년 금융 규제의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 AI 시대의 기축 통화… 4조 달러 시장을 향해
보고서는 마지막으로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가 스테이블코인의 새로운 기폭제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사람의 개입 없이 AI 에이전트끼리 데이터를 거래하고 연산 자원을 구매하는 ‘에이전트 경제(Agentic Economy)’에서 스테이블코인이 기축 통화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웹 표준 HTTP 402 코드를 활용한 결제 프로토콜 ‘x402’는 2025년 3분기 이후 일일 트랜잭션 75만 건을 돌파하며 AI 에이전트 간 소액 결제 수요가 실존함을 증명했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암호화폐 트렌드가 아니라, 비자보다 빠르고 SWIFT보다 저렴하며 전 세계 어디서나 접근 가능한 24시간 자금 시장이자 AI 경제의 금융 레이어로 진화하고 있다. 씨티그룹(Citigroup)은 2030년까지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최대 4조 달러(약 5,600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의 폭발적인 인프라 확장 속도를 고려할 때, 이는 오히려 보수적인 예측일 수 있다는 것이 업계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