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등 고대역폭 메모리 공급업체들이 내년 가격 협상에서 더 강한 주도권을 쥘 가능성이 커졌다. 인공지능 산업 확대로 HBM 수요는 빠르게 늘고 있는데, 공급은 그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워 계약가격이 올해보다 큰 폭으로 뛰어오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2일 이런 분석을 내놓으며, 현재 HBM 가격 구조가 공급업체들에 꼭 유리한 상황만은 아니라고 짚었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처리 속도를 높인 고성능 메모리로, 주로 인공지능 가속기와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에 들어간다. 그런데 올해 1분기 기준으로 보면 HBM의 웨이퍼당 매출은 DDR5 64GB RDIMM보다 낮아졌고, 수익성도 범용 D램 일부 제품에 뒤처진 것으로 분석됐다. 범용 D램은 DDR5, LPDDR5X, GDDR7, DDR4처럼 HBM을 제외한 일반 메모리 제품군을 뜻한다.
이런 구조는 오히려 메모리 업체들에 협상 카드가 될 수 있다. HBM 가격이 기대만큼 오르지 않으면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범용 D램 생산을 늘릴 유인이 생긴다. 다시 말해 HBM 생산 비중을 얼마나 가져갈지 공급업체들이 조절할 수 있다는 뜻이다. 트렌드포스는 현재 HBM 시장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3사가 주도하는 연간 가격결정 방식 때문에 최근 시장 가격 상승분이 계약가격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고 봤다. 그러면서 올해 2분기부터는 수요자와 공급자 간 논의가 2027년 공급 물량인 HBM4 중심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수요 측면에서는 가격을 밀어 올릴 요인이 더 뚜렷해지고 있다. 인공지능 서버와 데이터센터 투자가 이어지면서 HBM 탑재량 자체가 빠르게 늘고 있어서다. 트렌드포스는 올해 인공지능 주문형 반도체, 즉 에이식(ASIC)의 성능 고도화로 HBM 수요가 크게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인공지능 칩 1개당 HBM 탑재 용량도 기존 96GB, 192GB 수준에서 216GB, 288GB로 확대될 가능성이 제기됐다. 내년에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인공지능 플랫폼 루빈 울트라가 그래픽처리장치당 HBM 용량을 384GB까지 높이고, 구글 TPU를 비롯한 인공지능 에이식 출하도 늘어나면서 수요 확대가 더 두드러질 것으로 예상된다.
HBM 세대가 높아질수록 개별 다이(반도체 원판에서 잘라낸 칩) 크기가 커지고, 같은 생산능력으로 만들 수 있는 물량은 제한되기 쉽다. 이 때문에 HBM 생산 확대가 범용 D램 생산여력을 잠식하는 이른바 크라우드 아웃 효과도 심해질 수 있다. 트렌드포스는 이런 점이 공급업체들의 가격 인상 요구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봤다. 결국 내년 HBM 계약가격은 올해보다 몇 배 수준으로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다. 이 같은 흐름은 앞으로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이 계속 팽창할수록 HBM을 둘러싼 공급 우위가 더 강해지고, 메모리 업체들의 수익 전략도 HBM과 범용 D램 사이에서 더욱 뚜렷하게 갈릴 가능성을 시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