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을 계기로 국제 원유 거래에서 위안화 결제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달러가 장악해 온 석유 결제 구조에 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다만 위안화의 영향력이 커지고는 있어도 아직은 달러 중심 질서를 대체할 수준까지는 아니라는 평가가 함께 나온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가 21일(현지시간) 보도한 내용을 보면, 중국의 국경 간 위안화 지급 시스템인 시입스(CIPS) 거래 규모는 최근 크게 확대됐다. 중국 국영 매체에 따르면 지난 3월 하루 평균 결제액은 9천205억위안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4월 초에는 하루 결제액이 1조2천200억위안, 거래 건수는 4만2천건에 이르렀다. 시입스는 미국 주도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 스위프트(SWIFT)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이 키워온 자체 결제망으로, 위안화의 국제 사용을 넓히는 핵심 인프라로 꼽힌다.
이 같은 변화의 직접적인 배경으로는 러시아산과 이란산 원유 거래 방식의 변화가 지목된다. 미국이 에너지 공급 불안을 완화하기 위해 일부 제재를 조정했지만, 러시아와 이란은 여전히 달러 결제가 사실상 막혀 있다. 이 때문에 인도 같은 원유 수입국들은 대금을 치를 때 위안화를 활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싱가포르국립대의 버트 호프만 교수는 러시아가 달러를 사용할 수 없는 만큼 위안화 거래가 늘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봤고, 비엔피파리바 자산운용의 치 로 아시아태평양 수석 시장 전략가는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중국과의 양자 거래에서 위안화 사용을 늘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위안화가 당장 달러의 지위를 위협하는 단계는 아니다. 베이징 소재 지엠에프리서치는 위안화의 글로벌 원유 거래 비중을 3~8% 수준으로 추산했고, 제이피모건은 달러 비중이 여전히 약 80%라고 집계했다. 국제 원유 시장에서는 단순 결제 통화뿐 아니라 선물·옵션 같은 금융 파생상품 시장의 깊이와 유동성이 중요한데, 위안화가 달러에 본격적으로 맞서려면 이런 금융 생태계가 함께 커져야 한다. 그러나 서방 금융권의 관심은 아직 제한적이어서, 위안화 확대는 속도보다 범위가 조금씩 넓어지는 단계에 가깝다는 해석이 많다.
그럼에도 시장은 이번 흐름을 단순한 결제 편의의 변화로만 보지 않는다. 미국외교협회(CFR)의 벤 스테일 선임연구원은 중동 전쟁을 거치며 시입스가 실제 위기 상황에서도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이는 중국이 급격한 충돌보다 점진적인 위안화 국제화를 추구해온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결국 이번 변화는 이른바 페트로달러 체제, 즉 1970년대 이후 석유 거래를 매개로 굳어진 달러 중심 질서에 작은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읽힌다. 이 같은 흐름은 앞으로도 지정학적 갈등과 제재 환경, 중국의 금융시장 개방 수준에 따라 완만하지만 꾸준한 통화 다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