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형 은행들이 기존 예금과 결제망을 블록체인 환경에 연결하는 토큰화 예금 실험을 확대하고 있다. 새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기보다 은행 예금의 법적 성격과 청산 구조를 유지한 채 온체인 기능을 붙이는 방식이다.
더클리어링하우스(The Clearing House·TCH)는 6월 5일 17개 주요 금융기관과 함께 은행 주도 온체인 머니 구상을 공개했다. 구상의 뼈대는 은행 간 토큰화 예금의 온체인 청산·결제와 RTP·CHIPS 같은 기존 결제망을 잇는 연결층 구축이다.
TCH 발표문에는 스테이블코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았다. 은행권이 공개 블록체인 기반 결제수단과 직접 경쟁하는 별도 코인을 내놓기보다, 기존 예금과 지급결제 인프라를 디지털자산 활동에 접속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의미로 읽힌다.
토큰화 예금은 은행 예금을 블록체인 환경에서 기록하고 이전할 수 있게 만든 디지털 표시 방식이다. HSBC는 자사 토큰화 예금 서비스를 설명하면서 이를 은행 예금의 디지털 기록으로 정의하고, 1대1 토큰 구조와 사설 블록체인, 은행 규제를 전제로 한다고 밝혔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등 법정화폐나 특정 자산 가치에 연동되도록 설계된 암호화폐다. 토큰화 예금이 은행 예금의 연장선에 있다면, 스테이블코인은 더 넓은 공개 블록체인 환경에서 쓰이는 결제수단에 가깝다.
은행권이 주목하는 지점은 처리 속도만이 아니다. 핵심은 여러 지급 의무를 서로 상계해 실제 필요한 유동성을 줄이는 넷팅 구조다. 기존 은행 결제망의 강점을 온체인 활동에 접목하려는 시도라는 분석이다.
TCH는 CHIPS가 2025년 기준 26대1의 유동성 효율을 보인다고 안내한다. 1달러의 자금으로 약 26달러 규모의 결제 가치를 처리한다는 뜻이다. CHIPS의 평균 일일 결제 가치는 2조 달러(약 2757조원) 이상으로 제시됐다.
외환 결제에서도 같은 논리가 쓰인다. CLS는 현물환 결제에서 자금 필요량을 96% 이상 줄인다고 설명한다. 하루 결제 규모는 8조 달러(약 1경1029조원) 이상, 대상 통화는 18개다.
이런 구조는 토큰화 예금이 단순히 블록체인 위에 예금을 올리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은행 결제망의 유동성 관리 방식과 맞물려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어 원문이 언급한 오래된 은행권 방식도 상계와 유동성 절감 장치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도 토큰화 예금의 법적 성격을 예금으로 봤다. 트래비스 힐(Travis Hill) FDIC 의장은 4월 7일 지니어스 법안(GENIUS Act) 이행 제안 관련 성명에서 “토큰화된 형태의 예금도 연방예금보험법상 예금으로 남는다”고 밝혔다. 기술 형식이 달라져도 예금이라는 성격은 유지된다는 설명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은 8월 28일 연설에서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예금이 명확한 역할 분담 아래 공존할 수 있다고 봤다. 은행권의 토큰화 예금 실험이 스테이블코인을 전면 대체하는 흐름이라기보다, 결제수단별 용도 분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만 TCH의 공식 발표에는 기술 공급사, 사용 체인, 구체적 가동 시점이 담기지 않았다. 2027년 상반기 목표나 벤더 선정 여부 등은 2차 보도에서 제시된 내용으로, TCH 발표문에 직접 담긴 확정 일정은 아니다.
17개 은행이라는 숫자는 스위프트(Swift)가 7월 9일 발표한 별도 블록체인 원장 파일럿에도 등장한다. 두 프로그램은 모두 토큰화 예금을 다루지만 주체와 발표 시점이 다르다. 본지는 앞서 스위프트가 17개 은행과 토큰화 예금 파일럿을 준비한다고 보도했다.
스위프트 쪽 실험은 이후 실제 거래 단계로도 이어졌다. 본지는 HSBC와 스탠다드차타드가 스위프트 블록체인 기반 원장에서 첫 은행 간 토큰화 예금 실거래를 완료했다고 전했다. TCH 구상과 스위프트 파일럿은 모두 기존 금융망과 토큰화 예금을 연결하려는 흐름 안에 있지만, 동일한 사업은 아니다.
한국 독자에게 중요한 대목은 은행권이 온체인 결제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은행들은 공개 블록체인 위의 스테이블코인만으로 결제 미래를 설명하지 않고, 기존 예금·청산·결제망을 유지한 채 프로그래머블 결제와 24시간 처리 기능을 붙이는 길을 택하고 있다.
TCH가 공개한 구상은 자동화 워크플로, 더 풍부한 거래 데이터, 24시간 결제 지원을 목표로 한다. 활용처로는 프로그래머블 재무, 실시간 유동성 관리, 국경 간 지급, 디지털자산 결제, 자동화 금융 워크플로가 제시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