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초 이더리움(ETH) 커뮤니티가 ‘자기 점검’ 모드에 들어갔다. 가격이나 업그레이드 성과를 넘어, 이 네트워크가 궁극적으로 어떤 정체성을 지향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다시 중심으로 떠올랐다. 핵심은 이더리움이 ‘보이지 않는 인프라’로 제도권 금융과 기술 스택 아래 깔릴 것인지, 아니면 베이스 레이어(L1) 중심의 일관된 확장과 보안을 끝까지 밀어붙일지다.
지난해까지 시장에는 이더리움이 또 한 번의 성장 국면을 맞을 것이란 기대가 적지 않았다. 이번엔 크립토 네이티브 이용자보다 기관과 기술이 확산을 주도한다는 시나리오였다. 네오뱅크가 지갑, 가스비 같은 복잡성을 인터페이스 뒤로 숨기고 수백만 사용자를 조용히 온보딩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 구도에서 이더리움은 사용자를 ‘직접’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 겉으로는 크립토처럼 보이지 않는 서비스들이 늘어나고, 그 바닥에서 이더리움이 결제·정산·데이터 가용성 레이어로 작동하면 된다는 논리다. 이른바 ‘성공의 조건은 투명함이 아니라 ‘비가시성’’이라는 오래된 테제가 이어진 셈이다.
이 흐름은 사용자 경험 개선과 비용 절감을 목표로 해온 업그레이드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덴쿤(Dencun) 업그레이드에 포함된 ‘프로토-댕크샤딩(proto-danksharding)’은 레이어2(L2)가 트랜잭션 데이터를 올리는 방식을 바꿔 수수료 부담을 크게 낮췄고, 베이스 레이어의 효율 개선도 병행됐다. 그 결과 사용자는 기반 인프라를 이해하지 않아도 앱을 쓰는 구조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올해 초 몇 주가 지나며 서사는 달라졌다. 이더리움의 ‘코어 로드맵’으로 시선이 되돌아갔고, 확장 방식 자체를 둘러싼 긴장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L2 논쟁: “당신들은 이더리움을 스케일링하는 게 아니다”
올해 초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 이더리움 공동창업자는 생태계를 향해 직설적인 경고를 던졌다. “당신들은 이더리움을 스케일링하고 있지 않다(You are not scaling Ethereum).”
그동안 롤업을 중심으로 한 L2 확장은 ‘축제 분위기’에 가까웠다. L2는 이더리움 메인체인 밖에서 거래를 처리한 뒤 결과를 묶어 메인체인에 정산해 속도와 비용을 개선한다. 지난 몇 년간 L2는 폭발적으로 늘었고, 수수료는 내려갔으며, 활동도 여러 체인으로 분산됐다. 다만 부테린의 문제의식은 “거래가 늘고 싸졌으니 성공”이라는 단순한 결론을 넘어선다. 지금의 확장이 이더리움이 의도했던 ‘일관된 스케일링’인지, 아니면 각자도생의 확장인지가 쟁점이 됐다.
부테린이 특히 겨냥한 건 일부 L2 설계가 이더리움의 핵심 모델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화된 구성요소에 기대거나, 체인 간 환경이 ‘사일로’처럼 분리돼 베이스 레이어의 보안·검열저항·중립적 정산 기능을 충분히 ‘상속’하지 못한다는 비판이다. L2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현재 형태의 L2가 이더리움이 원래 지키려던 속성—강한 보안, 탈중앙성, 단일한 정산 레이어로서의 상호운용성—을 흔들 수 있다는 경고에 가깝다.
이 지적은 생태계 전반의 불안을 노출했다. L2 간 파편화, 제각각인 보안 가정, 중앙화 구성요소 의존은 ‘일시적 타협’이 아니라 ‘구조적 리스크’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더리움이 바깥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정작 이더리움을 가치 있게 만든 기반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다.
L2 팀들의 반응은 거센 반박이라기보다 ‘재정렬’에 가까웠다. 일부는 비판을 수용하며 향후 롤업이 단순히 ‘더 싼 이더리움’이 아니라 프라이버시, 소비자 앱, 특화 실행 환경 등 ‘전문화’로 차별화해야 한다고 방향을 잡았다. 반면 고처리량 환경은 여전히 필수라며 L2의 존재 이유를 더 강하게 دفاع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베이스 레이어 역시 손을 놓고 있진 않았다. 지난해 12월 진행된 푸사카(Fusaka) 하드포크는 메인 네트워크의 데이터 처리 용량과 효율을 높여 더 많은 거래를 소화하면서 비용을 낮추는 데 초점을 맞췄다. 다만 최근엔 거래 급증이 ‘주소 오염(address poisoning)’ 계열 사기와 연관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온체인 지표 해석을 둘러싼 논쟁도 뒤따랐다.
결국 이번 국면이 남긴 결론은 간단하다. 이더리움의 확장은 베이스 레이어의 구조적 업그레이드와, 기반 보안을 해치지 않으면서 생태계를 키울 ‘새로운 형태의 전문 롤업’ 사이에서 정교한 균형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자산운용사 21셰어스는 이런 흐름이 L2 ‘통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21셰어스는 리서치 보고서에서 “앞으로 1년은 이더리움 L2의 통합이 진행되는 시기가 될 수 있다”며 ETH 정렬(ETH-aligned), 거래소 지원, 고성능 네트워크 중심으로 ‘더 가볍고 회복력 있는 레이어’가 형성될 가능성을 언급했다.
양자 위협: 먼 미래에서 ‘당장 대비’로
확장 논쟁이 현재의 균열을 드러냈다면, 양자컴퓨팅은 미래의 전제를 흔드는 변수로 급부상했다. 오랫동안 논의는 있었지만 긴급 의제로 다뤄지진 않았던 양자 위협이 올해 들어 우선순위 상단으로 올라왔다는 평가다.
이더리움 재단은 ‘린VM(LeanVM)’ 같은 실행 환경 연구와 포스트-퀀텀(양자내성) 서명 체계 도입 논의를 끌어올리며 태도를 바꿨다. ‘학술적 고민’에 가깝던 주제가 단기 계획에 포함되기 시작했다는 점이 신호로 읽힌다. 네트워크가 다음 강세장만이 아니라, 암호학적 가정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위협까지 상정해 설계를 다시 짜고 있다는 뜻이다.
부테린 역시 양자컴퓨터가 장기적으로 블록체인 보안에 미칠 위험을 완화하기 위한 로드맵을 제시한 바 있다. 이더리움이 ‘보안과 신뢰’에 기대는 공개 인프라라는 점에서, 양자내성 전략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과제로 옮겨가고 있다.
재단 내부 변화: 리더십 교체가 던진 신호
기술·전략·철학적 재평가가 동시에 벌어지는 와중에, 재단 내부의 인사 변화도 시장의 해석을 부추겼다. 이더리움 재단 공동 전무이사였던 토마시 스탄차크(Tomasz Stańczak)의 이탈은 단순한 리더십 셔플 이상의 의미로 읽혔다. 최상단의 작은 변화도 조직의 우선순위 재조정을 시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변화가 의외였던 이유는 재단이 전통적으로 급격한 방향 전환을 꺼리는 문화로 알려져 있어서다. 스탄차크는 아야 미야구치(Aya Miyaguchi)의 장기 재임 뒤 약 1년 전쯤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비교적 빠른 교체는 재단이 확장과 보안 요구, 그리고 인공지능(AI) 같은 새로운 프런티어에 대한 역할 설정을 놓고 내부적으로도 ‘재정렬’을 진행 중임을 암시한다는 관측이 나온다.
‘트러스트 레이어’: AI 시대의 이더리움 역할론
AI는 크립토뿐 아니라 전 산업의 화두가 됐고, 이더리움의 비전에도 별도의 줄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부테린은 이더리움이 단순 결제나 디파이(DeFi)를 넘어, 탈중앙 AI 시스템을 조정하는 기반 레이어가 될 수 있다는 구상을 꺼내 들었다. 검증 가능한 AI 출력, 신뢰 최소화된 데이터 공유, 기계 간 경제 활동(machine-to-machine economy)까지 포괄하는 시나리오다.
이 논의는 갑자기 등장한 아이디어가 아니다. 재단은 지난해 초 ‘탈중앙 AI’ 연구 유닛(dAI)을 세우고 자율 에이전트, 기계 간 경제를 지원하는 방향을 실험해왔다. 당시엔 실험적 시도로 보였으나, 2026년에 들어 재단은 이더리움을 AI의 ‘트러스트 레이어(trust layer)’—출력을 검증하고 에이전트를 조율하며, 중앙화 플레이어가 지배해온 생태계에 신뢰 앵커를 제공하는 시스템—로 점점 더 또렷하게 프레이밍하고 있다.
확장(L2·L1), 양자 보안, AI 트러스트 레이어라는 세 갈래 의제는 이제 분리된 과제가 아니라 한 지점으로 수렴하고 있다. 과거엔 가격과 내러티브가 빠르게 바뀌며 논쟁을 덮기도 했지만, 올해의 쟁점은 ‘모멘텀’이라기보다 ‘구조’에 관한 문제에 가깝다. 쉽게 봉합되기 어려운 이유다.
단기적으로 이더리움의 초점은 여전히 베이스 레이어 스케일링에 맞춰져 있다. 올해 예정된 글램스터담(Glamsterdam) 업그레이드는 그 시험대로 꼽힌다. 업그레이드 성과에 따라 이더리움이 확장성과 보안을 함께 끌어올리며, 장기적으로는 양자내성까지 갖춘 AI 시대의 ‘신뢰 인프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전망이다.
🔎 시장 해석
- 2026년 초 ETH 커뮤니티의 초점이 ‘가격/업그레이드 성과’에서 ‘정체성’으로 이동: 보이지 않는 제도권 인프라가 될지, L1 중심의 일관된 확장·보안을 끝까지 밀어붙일지 갈림
- 덴쿤(프로토-댕크샤딩) 이후 L2 수수료 하락과 UX 개선으로 “ETH는 백엔드 인프라” 서사가 강해졌지만, 비탈릭의 경고로 L2 확장 방식의 질(보안 상속/상호운용성/탈중앙성)이 핵심 쟁점으로 부상
- 푸사카 하드포크로 L1도 처리·효율을 개선 중이나, 온체인 활동 증가가 사기(주소 오염)와 엮일 수 있다는 논쟁이 더해지며 ‘지표=건강’ 프레임이 흔들림
- 양자내성(포스트-퀀텀) 대비와 AI ‘트러스트 레이어’ 논의가 동시에 올라오며, ETH가 ‘확장·보안·신뢰 인프라’라는 구조적 의제로 수렴
💡 전략 포인트
- L2 투자/사용 관점: “더 싼 이더리움”만 볼 게 아니라 ① ETH 정렬(보안·정산 상속) ② 탈중앙화 로드맵(시퀀서/증명) ③ 상호운용성(브릿지·메시징) ④ 중앙화 구성요소 의존도를 기준으로 선별 필요
- 생태계 방향성: 전문 롤업(프라이버시, 소비자 앱, 특화 실행 환경) + L1 업그레이드의 ‘정교한 균형’이 승부처 → L2 난립보다 ‘통합/표준화’ 흐름(거래소 지원, 고성능 네트워크 중심)이 강화될 가능성
- 리스크 관리: 양자 위협은 “먼 미래”가 아니라 “아키텍처 선반영” 단계로 이동 → 장기 보유자는 서명체계 전환/계정 보안(향후 마이그레이션 이슈) 같은 기술적 변수도 체크
- 체크포인트: 글램스터담(Glamsterdam) 성과가 ‘L1 스케일링의 설득력’과 ‘AI 시대 신뢰 인프라’ 내러티브를 동시에 시험하는 분기점
📘 용어정리
- L1(베이스 레이어): 이더리움 메인체인. 최종 정산과 보안을 제공하는 기본 층
- L2(레이어2) / 롤업: 거래를 체인 밖에서 처리 후 결과를 L1에 기록·정산해 비용/속도를 개선하는 확장 방식
- 프로토-댕크샤딩(proto-danksharding): L2 데이터 게시 방식을 개선해 수수료를 낮추는 덴쿤 업그레이드 핵심 요소
- 사일로(silo)화: 체인·롤업이 서로 분리되어 상호운용성과 ‘공유 보안’ 효과가 약해지는 현상
- ETH 정렬(ETH-aligned): 이더리움의 보안·중립적 정산·검열저항 모델을 최대한 상속하도록 설계된 L2 성향
- 포스트-퀀텀/양자내성 서명: 양자컴퓨터에도 안전하도록 설계된 차세대 암호 서명 체계
- 트러스트 레이어(trust layer): AI 출력 검증, 데이터 공유, 에이전트 조율 등 ‘신뢰 앵커’를 제공하는 기반 인프라 역할
💡 자주 묻는 질문 (FAQ)
Q.
비탈릭이 말한 “당신들은 이더리움을 스케일링하는 게 아니다”는 무슨 뜻인가요?
L2가 거래를 싸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이더리움의 확장’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일부 L2가 중앙화된 구성요소에 기대거나, 롤업 간 환경이 파편화돼 이더리움의 핵심 가치(공유 보안·검열저항·중립적 정산·상호운용성)를 충분히 상속하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구조적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Q.
이더리움은 결국 L1을 키우는 건가요, L2를 키우는 건가요?
방향은 ‘둘 중 하나’가 아니라 균형에 가깝습니다.
L1은 하드포크(예: 푸사카)와 향후 글램스터담 업그레이드 등을 통해 처리 효율과 데이터 용량을 개선하고,
L2는 보안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전문화(프라이버시/소비자 앱/특화 실행 환경)와 표준화·통합(ETH 정렬, 거래소 지원 등)로 재편될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Q.
양자컴퓨팅·AI 얘기가 왜 갑자기 중요해졌나요?
양자컴퓨팅은 기존 서명/암호 가정을 무너뜨릴 수 있어, 재단이 LeanVM 같은 연구와 포스트-퀀텀 서명 도입 논의를 ‘장기 과제’에서 ‘단기 로드맵’ 쪽으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AI 확산으로 ‘검증 가능한 출력’과 ‘신뢰 최소화 데이터 공유’ 수요가 커지면서, 이더리움을 AI 시대의 ‘트러스트 레이어’로 포지셔닝하려는 비전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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