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디지털 유로 도입을 가속화하면서 사생활 보호와 민간 금융 위축 우려를 제기한 유럽의회 의원들과 마찰을 빚고 있다. ECB는 사이버공격이나 시스템 장애 시를 대비한 디지털 결제 수단의 백업으로 디지털 유로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유럽의회 일각은 검증되지 않은 기술이 과도한 권한을 중앙은행에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 우려를 나타냈다.
지난 4일 Piero Cipollone ECB 집행위원은 유럽의회 경제위원회에 출석해 “디지털 유로는 유럽 전역의 모든 국민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무료이며 보편적으로 수용 가능한 결제수단을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일부 의원들은 이용자 개인정보 보호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고, 중앙은행이 직접 계좌를 운영하면 민간 금융사의 경쟁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우려를 표명했다.
중앙은행 발행 디지털화폐(CBDC) 관련 법안은 이미 2023년부터 유럽의회에 계류 중이었다. 그러나 내년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논쟁이 격화되고 있어 법안 처리 일정은 줄곧 늦춰지고 있다. 디지털 유로는 유로존 일원화된 금융 인프라 확보라는 명분 아래 추진되고 있으나, 민감한 정보 접근권과 사적 금융 생태계에 미칠 영향 등을 둘러싼 갈등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Cipollone 위원은 “현재 유럽연합의 핵심 디지털 결제 시스템은 대부분 비EU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며 외부 플랫폼을 통한 결제 인프라가 위기 시 EU의 독자적인 대응 능력을 제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미국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확산에 공세를 강화하고 있는 점을 언급하며, 유럽 역시 자국 화폐의 디지털화를 통해 위기 대응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ECB는 디지털 유로가 중앙은행이 직접 통제하는 통화수단인 만큼 해킹이나 네트워크 장애와 같은 대규모 사고 발생 시 민간 플랫폼 의존도를 줄이고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의원들의 반발이 거센 만큼, 디지털 유로의 최종 도입 여부는 법안 내용에 사용자의 프라이버시 보장과 중앙은행의 권한 제한이 얼마나 명확히 반영되는지에 달려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