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디지털 자산 시장은 예상치 못한 역풍을 맞으며 출발했다. 연초 규제 환경 개선과 우호적인 거시경제 여건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비트코인은 핵심 지지선인 7만 달러를 하회했고, 위험자산 전반에 걸친 '리스크 오프(Risk-off)' 심리가 암호화폐 시장 전반을 짓눌렀다.
양적 완화에 비판적인 인물의 연준 의장 후보 지명, AI발 소프트웨어 섹터 충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시장의 불안감은 커졌다. 이 가운데 비트코인의 본질을 둘러싼 오래된 논쟁도 재점화됐다. "위험자산인가, 인플레이션 헤지인가, 화폐 가치 하락에 대한 방어 수단인가."
그러나 단기 변동성 너머를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토큰화(Tokenization), 스테이블코인, AI 기반 활용 사례는 여전히 강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으며, 글로벌 주요 금융사들의 기관 참여도 오히려 더 깊어지고 있다. 본질적인 생태계의 확장은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에이전틱 웹'이란 무엇인가
지금 디지털 자산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는 단연 AI와 블록체인의 융합이다. 두 기술은 그동안 각자의 영역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해 왔지만, 이제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급속히 진화하고 있다.
그 중심에 에이전틱 웹(Agentic Web)이라는 개념이 있다. 쉽게 말해, 사람이 일일이 클릭하고 입력하는 지금의 인터넷이 아니라, AI 에이전트가 사용자를 대신해 자율적으로 웹을 탐색하고, 계약을 체결하고, 결제까지 처리하는 미래 인터넷 환경을 의미한다.
이미 우리 일상에서도 그 전조는 보인다. 콜센터 대신 AI 챗봇을 이용하고, 포털 검색 대신 ChatGPT나 Claude 같은 대형언어모델(LLM)에 질문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에이전틱 웹은 이 흐름을 한 단계 더 가속화해, 사용자 인터페이스 자체가 인간 중심에서 기계 중심으로 전환되는 세상을 예고한다.
그 파급력은 숫자로도 드러난다. 맥킨지는 2030년까지 AI 에이전트가 주도하는 글로벌 B2C 리테일 거래 규모가 3~5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고, BCG는 2024년부터 2030년까지 AI 에이전트 시장이 연평균 45%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왜 블록체인인가
AI 에이전트가 자율적으로 인터넷을 누비는 세상이 오면, 필연적으로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난다. 신뢰, 보안, 책임 소재의 문제다.
AI 에이전트는 다음과 같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메모리 포이즈닝(Memory Poisoning): 잘못된 정보를 학습해 판단이 왜곡되는 현상.
의도 왜곡(Intent-Breaking): 겉으로는 정상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용자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는 현상.
블랙박스화: 시간이 지날수록 AI의 의사결정 과정이 불투명해지는 현상.
신원 사칭 및 개인정보 침해: AI가 사용자를 사칭하거나 접근해서는 안 될 민감 정보에 접근하는 위험.
바로 이 지점에서 블록체인의 역할이 부각된다. 블록체인의 불변성(Immutability), 투명성, 추적 가능성은 AI 에이전트의 행동 이력을 기록하고, 조작을 방지하며, 감사(Audit)가 가능한 신뢰 레이어를 구축하는 데 최적화된 특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받는 기술이 영지식증명(Zero-Knowledge Proof)이다. 이 기술을 활용하면 AI 에이전트가 민감한 정보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규정 준수 여부를 암호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투자 포트폴리오를 자동 리밸런싱하는 AI 에이전트는 구체적인 계좌 정보나 거래 전략을 공개하지 않고도 "금융 규정을 모두 준수했다"는 사실을 검증받을 수 있다.
AI 에이전트와 디지털 화폐의 만남
에이전틱 웹에서 가장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활용 사례는 바로 결제다. AI 에이전트가 진정한 자율성을 갖추려면, 사람의 개입 없이 24시간 365일, 국경을 넘어 결제를 처리할 수 있는 인프라가 필요하다. 기존 은행 시스템으로는 이를 충족시키기 어렵다.
갤럭시 디지털 CEO 마이크 노보그라츠가 "AI 에이전트가 스테이블코인의 최대 사용자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테더 CEO 파올로 아르도이노가 "미래에는 모든 AI 에이전트가 자체 수탁형 지갑을 보유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인프라 구축도 빠르게 진행 중이다.
구글은 AI 에이전트 간 결제의 신뢰와 인증 방식을 표준화한 에이전틱 결제 프로토콜(AP2)을 공개했다. 코인베이스는 클라우드플레어와 협력해 사람의 개입 없이 AI끼리 직접 결제할 수 있는 x402 프로토콜을 출시하고, Claude·Gemini 같은 LLM이 블록체인 지갑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페이먼트 MCP도 선보였다. 이더리움 재단은 AI 에이전트의 신원·평판·검증을 위한 탈중앙화 인프라 표준인 ERC-8004 제안을 공개했다.
a16z는 "블록체인이 없다면 AI 네이티브 인터넷은 신뢰를 잃을 것"이라며 블록체인을 에이전틱 웹의 '빠져서는 안 될 레이어(Missing Layer)'로 규정했다. 2026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도 이 주제가 핵심 화두로 떠오르며, 에이전틱 웹 논의가 이론에서 실제 구현 단계로 본격 이동했음을 보여줬다.
변동성 너머의 구조적 흐름
단기 가격 변동에 시선이 쏠리는 사이, 디지털 자산 생태계의 판은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바뀌고 있다. AI와 블록체인의 융합은 단순한 기술적 트렌드가 아니라, 인터넷의 작동 방식 자체를 재편할 구조적 변화다.
비트코인이 오르고 내리는 것과 별개로, 스테이블코인은 AI 에이전트의 결제 수단으로, 블록체인은 에이전틱 웹의 신뢰 인프라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이 흐름을 이해하는 투자자와 그렇지 못한 투자자 사이의 격차는 앞으로 더욱 벌어질 것이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니다. 차세대 인터넷의 기반이 놓이는 과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