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가상자산과 인공지능(AI)은 선거판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관련 업계가 막대한 정치자금을 투입해도 유권자의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후보에게는 “코인 업계의 후원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약점이 된다. 돈으로 정책은 움직일 수 있어도 민심까지 살 수는 없다는 정치의 오래된 법칙이 다시 확인되고 있다.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6월 3일 치러지는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제21대 대통령선거 이후 1년 만에 실시되는 선거다. 집권 1년 차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는 정권 초반의 국정 동력을 확인받는 선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선거를 앞둔 여권의 손에는 미국 정치권이 부담스러워하는 바로 그 카드, 즉 디지털자산 정책이 들려 있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이후 가상자산 현물 ETF 도입, 토큰증권(STO) 제도화,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발행, 가상자산 2단계 입법 등을 주요 과제로 내세웠다. 대통령이 직접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필요성을 언급했고, 여당은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에 속도를 냈다. 미국에서 크립토가 정치적 부담으로 취급되는 동안, 한국에서는 집권 세력이 이를 국가 전략의 전면에 세운 셈이다.
명분은 통화 주권이다. 지금 디지털자산 시장의 결제 수단은 테더와 USDC 같은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주도하고 있다. 이 흐름이 굳어지면 디지털 경제에서도 달러 의존이 커질 수 있다.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런 위기의식에서 나온다. 일견 타당하다. 디지털 금융 질서가 바뀌는 시기에 한국이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좋은 명분이 곧바로 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유권자의 기억 속에는 테라·루나 사태, 거래소 사고, 상장 비리, 투자자 피해가 아직 생생하다. 코인은 누군가에게는 미래 산업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순간에 삶의 기반을 무너뜨린 투기판이다. 정부가 디지털자산을 미래 산업이라고 말해도, 국민이 먼저 떠올리는 것이 피해와 불신이라면 정책은 힘을 얻기 어렵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도 간단하지 않다. 정부와 여당은 이를 디지털 금융 경쟁력의 핵심으로 본다. 하지만 실제 제도를 설계하는 순간, 누구에게 발행을 허용할 것인지가 곧바로 쟁점이 된다. 최근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를 은행이 과반 지분을 가진 컨소시엄으로 제한하는 이른바 ‘51% 룰’이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포인트가 아니다. 원화와 1대1 가치를 내세우는 결제 수단인 만큼 지급 준비, 환매 능력, 자금세탁 방지, 예금 유출 가능성까지 관리해야 한다. 아무 사업자에게나 문을 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은행 중심 컨소시엄 방식으로 가면 안정성은 높일 수 있지만,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혁신 산업이 아니라 기존 금융권의 새 허가 사업으로 굳어질 수 있다. 핀테크 기업, 블록체인 기업, 거래소는 들러리로 밀려나고 은행이 주도권을 쥐는 구조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비은행 사업자에게 문을 넓게 열면 예금 유출과 통화 질서 훼손 논란이 커진다. 한쪽은 특혜 논란, 다른 한쪽은 금융 안정 논란이다. 어느 길도 쉽지 않다.
국민이 묻는 것은 복잡하지 않다. “이것이 국가 전략인가, 새 사업권 배분인가.” 투자자 보호와 불공정거래 차단 장치가 충분히 갖춰지기도 전에 은행, 거래소, 대형 플랫폼 중심으로 판이 짜인다면 디지털자산 정책은 혁신이 아니라 이권으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정책이 특정 업권의 이해와 너무 가까워 보이는 순간, 그 정책은 선거판에서 부담이 된다.
2027년부터 시작되는 가상자산 과세도 민감한 문제다. 현행 제도상 가상자산 소득은 2027년 1월 1일 이후 양도·대여분부터 기타소득으로 분리과세된다. 연 250만 원을 공제한 뒤 세율 20%가 적용되고, 지방소득세까지 포함하면 투자자가 체감하는 세율은 22%다. 2027년 이전 보유분에 대해서는 일정한 취득가액 특례가 마련돼 있지만, 투자자에게 본격적인 세금 고지서가 날아온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주식과의 형평성 논란은 피하기 어렵다. 국내 상장주식은 대주주가 아닌 소액주주가 장내에서 양도할 경우 원칙적으로 양도소득세 과세 대상이 아니다. 반면 가상자산은 일정 공제 후 과세 대상이 된다. 같은 개인 투자자라 해도 주식 투자자는 비과세 혜택을 누리지만, 코인 투자자는 22% 세율을 감수해야 하는 구조다.
물론 가상자산을 영원히 과세 사각지대에 둘 수는 없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원칙은 맞다. 문제는 순서와 형평성이다. 정부가 한쪽으로는 디지털자산 산업을 키우겠다고 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투자자에게 주식보다 불리하게 느껴지는 세제를 적용한다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산업은 키우겠다면서 투자자에게는 먼저 세금계산서를 내미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투자자층에는 이 문제가 예민하다. 부동산 사다리는 높고, 주식시장은 답답하며, 코인은 위험하지만 여전히 기회의 통로라고 느끼는 세대가 적지 않다. 이들에게 22% 과세는 단순한 조세 문제가 아니다. “왜 코인 투자자만 더 가혹하게 다루느냐”는 불만으로 번질 수 있다. 정부가 디지털자산을 국가 전략으로 말하면서도 투자자 보호, 손실 처리, 불공정거래 단속, 과세 형평성에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코인 정책은 표가 아니라 역풍이 된다.
AI 정책도 같은 교훈을 준다. 정부는 ‘AI 시대 고속도로’ 구축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반이 되는 데이터센터는 곳곳에서 주민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실제 수도권 곳곳에서 데이터센터 건립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김포 구래동에서는 주거지 인근 데이터센터와 특고압선 문제를 둘러싸고 주민 반발과 행정절차 갈등이 벌어졌고, 일부 사업은 행정심판으로까지 이어졌다. 도심형 데이터센터 개발 사례도 늘고 있어, 전력·소음·열·전자파를 둘러싼 주민 우려는 앞으로 더 커질 수 있다.
데이터센터는 AI 산업의 심장이다. 하지만 주민에게는 대표적 기피시설이다. 중앙정부는 ‘AI 강국’을 말하지만, 주민은 “왜 하필 우리 동네냐”고 묻는다. 이것이 지방선거의 본질이다. 지방선거는 거대 담론을 심판하는 동시에 내 집 앞 문제를 따지는 선거다. 광역단체장 후보는 첨단 산업 유치를 외치고, 기초의원 후보는 주민과 함께 반대 현수막을 들 수 있다. 중앙의 성장 전략과 지역의 생활 불안이 같은 투표용지 위에서 충돌하는 것이다.
디지털자산 정책도 이와 다르지 않다. 중앙에서는 통화 주권, 금융 혁신, 글로벌 경쟁력을 말한다. 그러나 유권자는 더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다. 내 돈은 안전한가. 세금은 공정한가. 특정 업계만 혜택을 보는 것은 아닌가. 사고가 나면 누가 책임지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아무리 그럴듯한 국가 전략도 선거판에서는 힘을 잃는다.
가장 큰 위험은 정파성이다. 디지털자산이 한 정당의 대표 상품처럼 각인되는 순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산업 전체가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 규제는 냉탕과 온탕을 오가고, 기업은 장기 투자를 주저한다. 산업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구호가 아니라 예측 가능성이다. 혁신 산업일수록 더 안정적인 제도와 초당적 합의가 필요하다.
이미 원화 스테이블코인 문제를 놓고 정부·여당과 한국은행 사이의 시각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비은행권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어디까지 허용할지, 통화 질서와 금융 안정성을 어떻게 지킬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충분하지 않다. 한 지붕 아래서도 의견이 갈리는데, 정권이 바뀌면 정책 전체가 뒤집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6·3 지방선거는 디지털자산만을 놓고 치르는 선거는 아니다. 그러나 이 선거는 ‘코인 친화 정부’에 대한 민심의 첫 중간평가가 될 수 있다. 정부가 말하는 미래 산업 전략이 국민에게 희망으로 들릴지, 아니면 특정 업계와 금융권을 위한 새 사업권 배분으로 보일지 가늠하는 시험대다. 여기에 2027년 과세라는 현실 문제가 겹치면 코인 민심은 더 복잡해진다. 혜택은 불확실한데 세금은 확실하다고 느끼는 순간, 유권자는 냉정해진다.
코인이 표가 될지, 짐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분명한 것은 하나다. 산업은 정책으로 키울 수 있지만, 신뢰는 정책 발표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시장을 투명하게 만들고, 사기를 막고, 거래 질서를 세우고, 과세 형평성까지 설득해야 한다. 국민이 납득하지 못하는 혁신은 선거판에서 언제든 역풍이 된다. 디지털자산 정치의 첫 시험대가 이제 막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