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인권운동가 스테이시 박 밀번의 모습이 새겨진 25센트 동전이 8월 11일부터 미국 전역에 공식적으로 유통된다. 한국계 인물이 미국 화폐에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사회적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조하는 미국 사회의 흐름을 상징하는 사례로 평가된다.
이번에 발행되는 동전은 미국 재무부와 연방 조폐국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아메리칸 위민 쿼터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작됐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 역사에 영향을 준 여성 20인을 선정해, 이들의 모습을 2022년부터 올해까지 동전 뒷면에 순차적으로 새기고 있다. 스테이시 박 밀번은 열아홉 번째 인물로 선정돼 이번 시리즈에 포함됐다.
밀번은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성장한 한국계 미국인이다. 주한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선천적인 근육 질환으로 인해 어려서부터 장애를 안고 살았다. 그러나 어릴 적에는 자신을 ‘장애인’으로 인식하지 못하다가, 반복적인 의료 치료와 수술을 겪으며 타인과의 차이를 깨닫게 됐다. 이후 지역사회에서 다른 장애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인권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6세에 이미 주정부의 여러 위원회에 참여하면서 활동 기반을 넓혀갔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는 2007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모든 학교가 장애인의 역사와 권리를 가르치도록 한 법률 제정에 주요 역할을 한 것이다. 이후 그는 캘리포니아 베이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장애인 정의 문화 클럽'이라는 단체를 설립하고, 장애인 인권운동의 개념인 ‘장애인의 정의(Disability Justice)’를 구체화했다. 이 개념은 단순히 장애 여부를 넘어서, 유색인종, 이민자, 성소수자, 노숙인 등 사회 내 다중 약자들이 겪는 중첩된 불평등을 함께 조명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밀번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지적장애인위원회 위원으로 지명되며 연방 정부 차원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코로나19 방역 초기에는 마스크, 치료약, 위생용품을 저소득층과 노숙인에게 전달하는 자원봉사 팀을 자발적으로 조직해 지원에 나서는 등 실천적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신장암 투병 중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2020년 5월 수술 후 합병증으로 서른세 번째 생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번 동전에는 전동휠체어에 앉은 밀번이 청중에게 연설하는 모습이 담겼다. 그의 상반신에는 목에 튜브 고정장치가 있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됐으며, 동전 테두리에는 ‘장애인의 정의’라는 문구와 그의 이름이 함께 새겨졌다. 연방 조폐국은 이 동전이 “진정성 있는 대화와 연대를 상징한다”고 설명하며, 밀번에게 “리더이자 문제 해결자, 공감과 헌신을 갖춘 운동가”라는 평가를 내렸다.
이번 동전 발행은 미국 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의 사회 공헌을 기리고, 이민자와 장애인을 포함한 소수계층의 공로를 제도적 차원에서 인정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향후에도 미국 내 화폐 디자인은 경제적 상징을 넘어서, 사회 가치와 역사 인식의 수단으로 점점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