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 이후 9% 가까이 가치가 하락한 미국 달러가 2022년 3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지며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달러 인덱스는 지난 12일(현지시간) 98.6까지 하락하며 반년 기준으로는 2002년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할 가능성이 커졌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기축통화 해체’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가운데, 일부는 세계가 ‘탈(脫)달러화’ 흐름에 본격 진입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달러화 급락의 배경에는 복합적인 글로벌 자산 쏠림 현상이 있다. 특히 미국 경제의 불확실성, 국제 금융 시스템 내 미국 주도권의 약화 가능성,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무역정책이 달러 약세를 부채질한 요인으로 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이른바 ‘해방의 날(Liberation Day) 관세’를 공개하며 추가 보호무역 강화를 시사했고, 이로 인해 주식과 국채 시장에서 외국인 자금의 이탈 조짐까지 감지되고 있다.
재닛 옐런 전 재무장관은 이러한 패턴이 “매우 이례적”이라며, 통상 안전자산 역할을 해온 미국 국채와 달러가 동시에 약세를 보이는 현상은 국제 투자자들이 미국 재정 시스템 전체에 대한 신뢰를 조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경고했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무역 정책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미국 국채를 대량 매도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그러나 월가는 여전히 달러 수요의 탄탄함을 강조한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최근 보고서에서 “세상은 생각보다 빠르게 ‘달러화’되고 있다”며, 전통 금융권 포함 비은행 금융기관(NBFI)의 자산 증가를 그 근거로 제시했다. NBFI는 2009년 28조 달러(약 4경 320조 원)에서 2022년 63조 달러(약 9경 720조 원)로 자산 규모를 2배 이상 확대했다. 이에 BoA는 “이 같은 성장 자체가 달러에 대한 전방위적 수요를 시사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미국 주식시장과 부동산의 가치 상승도 달러 기반 자산에 대한 선호를 이끄는 주요 요인이다. BoA에 따르면 미국 주식 시장은 2008년 11조 달러(약 1경 5,840조 원) 규모에서 현재 60조 달러(약 8경 6,400조 원)로 급성장했으며, 미국 내 주택 자산도 같은 기간 두 배에 가까운 증가세를 보였다. 전통적인 ‘탈달러화’가 실현되려면 정부가 재정 흑자를 유지하거나 민간·기업 부문의 총부채를 줄여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BoA의 판단이다.
글로벌 금융 주도권을 이어가기 위한 미국 정부의 전략도 주목된다. 미 상원은 최근 스테이블코인 법제화 근거가 될 GENIUS법 추진에 속도를 내며, 디지털 형태의 달러 수요 강화를 모색하고 있다. 테네시주 공화당 소속의 빌 해거티 상원의원은 이번 법안이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영구히 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향후 달러 연계형 스테이블코인이 보편화될 경우, 미국 정부는 단기 국채 위주의 발행으로 이자 부담을 낮출 수 있고, 미 재무부 자산의 글로벌 유통도 확대될 수 있다. BoA는 이 같은 디지털 자산 기반 화폐정책이 미국의 대외 신뢰도를 높이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결국 미국 달러의 가치 하락이 일시적인 조정인지, 기축통화 질서 재편의 신호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그러나 미국 정부와 금융시장은 디지털 혁신과 금융 상품 다변화를 통해 글로벌 금융 주도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가속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