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스타트업 생태계가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글로벌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도쿄에서 열린 ‘스케일업 서밋 재팬(Scaleup Summit Japan)’ 현장을 찾은 알베르토 오네티 Mind the Bridge 회장은 “일본은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혁신의 중심지”라며 그 잠재력에 주목했다. 지난 몇 년 간 정부 주도의 투자 확대, 국제 교류의 증가, 그리고 전통 기업의 개방적 자세 변화가 맞물리며 일본은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스타트업 계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정부 수준의 체계적 투자 전략이다. 기시다 총리는 2022년 ‘스타트업 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2027년까지 총 10조 엔(약 96조 원)을 스타트업 육성에 투입하겠다고 선언했다. 목표는 명확하다. 현재 약 2만2,000개에 불과한 스타트업 수를 10만 개로 확대하고, 유니콘 기업도 6개에서 100개로 늘리겠다는 것이다. 비록 다소 공격적인 수치로 보일 수 있으나 일본 정부의 정책 실행력과 행정 역량을 감안하면 결코 허황된 청사진만은 아니라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성과도 눈에 띈다. 2024년 한 해에만 238개의 스케일업(고속 성장 단계 스타트업)이 새롭게 등장했고, 이들이 끌어모은 투자금은 총 50억 달러(약 7조 2,000억 원)에 달했다. 스타트업 생태계의 체질 자체가 고도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특히 일본은 AI, 첨단 제조, 클린 에너지 등 이른바 ‘하드테크’ 중심의 기술력이 강한 구조라는 점에서 투자 회수 기간은 다소 길더라도 고부가가치 창출력이 높다는 장점이 있다.
글로벌 기업과 각국 정부도 이런 일본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현재 일본에 진출한 해외 개방형 혁신 거점 41개 중 15곳이 미국 기업인 만큼, 기존의 미-일 기술 협력 축은 여전히 견고하다.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도 잰걸음으로 접근 중이다. EU 주일대사 장-에릭 파케는 “미국 정책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유럽이 일본과의 전략적 연대를 강화할 기회가 열렸다”고 밝히며 유럽의 적극적 진출을 시사했다.
하지만 정작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일본 대기업의 태도 변화다. 지금까지 일본 기업들은 자사 내 R&D 중심의 폐쇄적 혁신 모델에 의존해 왔지만, 최근 들어 외부 스타트업과 협력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을 점차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예컨대 미쓰비시와 같은 복합 대기업은 AI 솔루션 태스크포스를 출범하고 기존 CVC(기업형 벤처캐피탈) 조직을 통합 운영하는 등 운영 효율화와 기술 도입 속도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은 이미 실리콘밸리와 미국 동부에서 가장 활발한 외국계 CVC 투자자로 자리잡은 상태여서 글로벌 트렌드 파악에도 앞서 있다.
결국 일본 스타트업 생태계는 정부 행정, 대기업 투자, 글로벌 관심이라는 삼박자가 맞물리며 질적·양적 도약을 이뤄내고 있다. 수면 아래서 역동적으로 변화해온 일본은 이제 아시아의 주변국이 아닌, 글로벌 혁신 지형의 주도권 경쟁에 뛰어든 주체로 평가받고 있다. 성장을 준비 중인 스타트업과 투자자라면, 일본이라는 시장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