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트럼프의 '아메리칸 비트코인', 암호화폐 산업의 지각변동 예고

에릭 트럼프와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가 캐나다계 채굴기업 헛8(Hut 8)과 손잡고 설립한 ‘아메리칸 비트코인(American Bitcoin Corp.)’이 미국 암호화폐 업계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헛8이 보유한 채굴 자산을 출자해 80% 지분을 확보한 반면, 트럼프 일가는 20%를 보유하고 에릭 트럼프는 최고전략책임자(CSO)로서 회사 운영 전면에 나섰다.

정치적 명성을 바탕으로 출범한 이 채굴 기업은 “세계 최대·최고 효율의 순수 비트코인 채굴 기업”을 표방하며, 50 EH/s 이상의 해시레이트 확보와 전략적 비트코인 비축 계획을 발표했다. 5월에는 그리폰 디지털 마이닝과의 합병을 통해 나스닥 상장도 추진 중이다.

정치와 블록체인의 결합 기회인가, 위협인가

트럼프 대통령이 비트코인을 지지하며 “미국을 세계 암호화폐 수도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이후, 공화당 보수 진영은 암호화폐 산업과 적극적으로 연계되고 있다. 특히 채굴 산업은 에너지 산업 활성화와 맞물려 공화당의 새로운 경제 어젠다로 부상했다.

그러나 정치권과의 결합은 산업의 정파화라는 리스크도 수반한다. 실제로 트럼프 일가가 개입한 스테이블코인 법안은 이해충돌 논란으로 입법이 좌초됐고, 민주당 측은 트럼프 가족의 채굴 사업 개입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는 산업 전반의 중립성과 신뢰성에 타격을 줄 수 있다.

비트코인은 본래 중앙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한다. 그러나 아메리칸 비트코인이 계획대로 50 EH/s 규모의 해시레이트를 확보한다면, 특정 정치세력이 네트워크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진다.

더구나 에릭 트럼프는 ‘컴플라이언스 등급 비트코인’ 개념을 제시하며 채굴된 비트코인의 유통 경로와 환경 인증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기관투자 유치에는 도움이 되지만, 비트코인의 동질성과 탈검열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ETF와 기관 자금의 연계 전략

아메리칸 비트코인은 현물 비트코인 ETF 시장의 공급처로서 입지를 노리고 있다. 컴플라이언스 인증과 자체 보유 비트코인을 강점으로 내세워, 연기금 등 보수적인 투자기관과의 직거래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다.

또한 비트코인 비축 전략은 향후 파생상품 출시나 담보 대출 등 다양한 금융 모델로의 확장 가능성도 시사한다. 이러한 접근은 채굴 산업이 단순한 ‘채산성 경쟁’을 넘어 제도권 금융과의 융합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경쟁 구도 변화와 차별화 전략

기존 강자인 라이엇, 코어 사이언티픽과 달리, 아메리칸 비트코인은 정치권 네트워크와 규제 대응력, 전략적 비축 등의 차별화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또한 헛8과의 분업 구조를 통해 채굴 부문의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하이브리드형 모델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북미 채굴 시장 전반의 판도 변화를 촉진할 것으로 보인다. 라이엇 등 경쟁사들은 ESG 경영과 AI 연계 등 사업 다각화로 대응하며 새로운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에너지 인프라와의 연계: 미국형 해시레이트 자립 실험

아메리칸 비트코인은 풍부한 미국 내 에너지 자원을 활용해 전력 비용을 글로벌 평균 대비 1/3 수준으로 낮춘다는 전략이다. 유전 폐가스, 수력, 태양광 등을 활용한 친환경 채굴은 탄소 배출 감축과 그리드 안정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나아가 데이터센터 인프라와의 연계도 염두에 두고 있다. 헛8의 HPC 역량과 결합해, 채굴과 AI 연산을 병행하는 구조로 발전할 경우, 미국의 디지털 자산 및 기술 자립의 핵심 기지로 거듭날 가능성도 있다.

산업과 정치의 공진화, 그 명암

아메리칸 비트코인은 단순한 신생 채굴기업이 아닌, 미국 정치권력과 제도권 자본, 에너지 인프라가 결합한 복합체다. 이는 미국이 디지털 금 채굴을 통해 새로운 금본위제를 수립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비트코인의 철학적 정체성과 글로벌 분산 네트워크의 건강성은 시험대에 올랐다. 향후 규제 환경, 기관 자금 유입, 경쟁사 대응, 비트코인 가격 변동 등 복합적 요인이 이 실험의 향방을 좌우할 것이다.

비트코인은 탈중앙화를 핵심으로 삼는 기술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치, 자본, 에너지가 그 주도권을 놓고 다시 한 번 격돌하고 있다. 아메리칸 비트코인은 그 갈등의 한가운데서 새로운 산업질서를 예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