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후 일본 도쿄 더 프린스 파크타워에서 열린 ‘WebX 2026’.
오후 4시 50분, 메인 무대에 기타오 요시타카 SBI홀딩스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올해 75세인 그는 앞서 무대에 오른 젊은 창업자들처럼 성큼성큼 걸어 나오지 못했다. 다소 불편해 보이는 걸음으로 천천히 단상에 도착한 뒤, 준비된 의자에 앉아 마이크를 잡았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행사 막바지에 배치된 원로 경영자의 짧은 회고 정도를 예상한 참석자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설이 시작되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기타오 회장은 앉은 자리에서 30분을 넘기고, 다시 40분을 지나 예정된 50분을 거의 온전히 채웠다. 금융과 기술, 기업가 정신, 디지털자산 산업이 나아갈 방향을 쉼 없이 풀어냈다.
몸의 속도는 느려졌지만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이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새로운 기술을 설명하는 화려한 슬라이드도, 특정 디지털자산의 가격 전망도 아니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금융그룹을 이미 일군 75세의 경영자가 여전히 다음 산업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였다.
기타오 회장은 과거의 성공을 정리하러 무대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또 한 번 미래에 베팅하고 있었다.
이미 성공한 사람이 다시 위험을 택했다
기타오 회장은 일본 금융산업에서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인물이다.
노무라증권을 거쳐 소프트뱅크에서 금융사업을 이끌었고, 1999년 SBI의 전신인 소프트뱅크 인베스트먼트를 출범시켰다. 이후 온라인 증권과 은행, 보험, 자산운용, 벤처투자를 아우르는 종합금융그룹을 구축했다.
인터넷이 금융산업의 유통 구조를 바꾸던 시기, 그는 기존 증권사 중심의 질서에 도전했다. 지점과 전화 주문에 의존하던 시장에서 온라인 거래와 낮은 수수료를 앞세웠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 금융은 기존 금융의 일부를 보완하는 실험에 가까웠다.
그러나 인터넷은 결국 금융의 중심이 됐다.
SBI 역시 일본을 대표하는 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대부분의 경영자라면 여기서 멈췄을 것이다. 이미 검증된 사업을 지키고, 위험한 신사업은 젊은 경영진에게 맡긴 뒤 자신은 명예로운 퇴장을 준비했을 수 있다.
기타오 회장은 다른 길을 택했다.
인터넷 금융에서 거둔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블록체인과 디지털자산, 토큰화, 인공지능으로 다시 방향을 틀었다. 한 번의 성공 공식을 반복하기보다 그 성공 공식을 무너뜨릴 수 있는 새로운 기술에 먼저 들어갔다.
젊은 창업자의 도전보다 성공한 경영자의 재도전이 더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과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은 실패했을 때 잃을 것도 많다. 평판과 주가, 기존 사업, 조직 내부의 반대까지 감수해야 한다.
기타오 회장의 선택은 그래서 더 무겁다.
그의 ‘다음 베팅’은 유행을 따라 새로운 상품 하나를 추가하는 수준이 아니다. 인터넷이 금융을 바꿨던 것처럼 블록체인과 AI가 금융의 구조를 다시 바꿀 수 있다는 판단에 가깝다.
블록체인은 은행을 없애는 기술이 아니었다
디지털자산 산업은 오랫동안 은행과 기존 금융을 밀어내는 기술로 설명됐다.
중개자 없이 돈을 보내고, 국가와 은행의 허락 없이 자산을 거래하며, 중앙기관이 아닌 네트워크가 신뢰를 보증한다는 것이 블록체인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이날 기타오 회장의 연설이 보여준 방향은 달랐다.
블록체인은 기존 금융을 무너뜨리기보다 금융의 내부로 들어오고 있었다. 은행과 증권, 보험, 자산운용을 연결하고, 결제와 자산 발행, 보관과 정산의 구조를 다시 설계하는 기술로 자리 잡고 있었다.
SBI는 이미 디지털자산 거래와 수탁, 블록체인 인프라, 토큰증권, 해외 디지털금융 사업에 폭넓게 참여하고 있다. 단순히 디지털자산을 사고파는 시장에 머무르지 않고 전통 금융과 온체인 금융을 연결하는 구조를 만들려는 것이다.
기타오 회장에게 블록체인은 금융회사가 피해야 할 외부의 위협이 아니었다.
다음 세대의 금융회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새로운 운영체제에 가까웠다.
이는 역설적이다.
블록체인은 은행을 없애겠다는 구호로 출발했지만, 이제 가장 적극적으로 블록체인을 연구하고 활용하는 주체 가운데 하나가 대형 금융그룹이 됐다.
기술은 기존 질서를 단번에 없애지 않는다. 대신 기존 질서 가운데 변화에 적응한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을 갈라놓는다.
기타오 회장은 그 변화의 바깥에서 기다리기보다 안으로 들어가는 쪽을 택했다.
혁신은 젊은 사람의 언어가 아니다
WebX 2026 행사장에는 젊은 창업자와 개발자, 글로벌 투자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발표도 이어졌다.
하지만 이날 행사에서 가장 강한 도전정신을 보여준 인물은 어쩌면 75세의 기타오 회장이었다.
혁신은 흔히 젊음과 연결된다. 빠르게 말하고,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며, 기존 질서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모습이 혁신가의 전형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진짜 혁신은 외형보다 태도에 가깝다.
지금 알고 있는 방식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이미 성공한 사업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다시 배우고 다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혁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날 기타오 회장은 누구보다 젊었다.
걸음은 느렸지만 시선은 다음 세대를 향했다. 연설은 과거의 업적을 자랑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고, 금융산업이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향했다.
그의 모습은 혁신에 정년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나이가 들어서 도전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도전을 멈추는 순간 늙는다는 말이 현장에서 실감났다.
시장이 좋을 때만 외치는 혁신은 혁신이 아니다
디지털자산 산업은 지난 수년 동안 극심한 부침을 겪었다.
가격이 오를 때는 대기업과 금융기관이 앞다퉈 블록체인을 이야기했다. 전담 조직이 생겼고, 업무협약과 투자 발표가 이어졌다.
하지만 시장이 꺾이고 사고가 터지자 분위기는 빠르게 바뀌었다. 사업은 축소됐고, 관련 조직은 통폐합됐으며, 블록체인은 다시 ‘검토 대상’으로 밀려났다.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기업이 혁신을 장기 전략이 아니라 시장 분위기에 따라 켜고 끄는 홍보 수단으로 다뤘다. 가격이 오르면 미래 산업이 되고, 가격이 떨어지면 위험 자산이 됐다.
기타오 회장의 행보가 달라 보이는 이유는 시장의 열기와 무관하게 디지털금융에 대한 투자를 이어왔기 때문이다.
블록체인과 디지털자산이 당장 수익을 내지 못하더라도 금융의 기반 구조를 바꿀 가능성이 있다면 꾸준히 준비해야 한다는 태도다.
도전정신은 낙관적인 전망을 크게 말하는 데 있지 않다.
불확실성이 커지고 시장의 관심이 줄어든 뒤에도 준비를 계속하는 데 있다. 남들이 떠날 때도 다음 사이클을 위해 사람과 기술, 제도를 쌓는 것이 진짜 베팅이다.
기타오 회장은 디지털자산 시장의 가격에만 베팅한 것이 아니다.
금융의 구조가 결국 바뀔 것이라는 방향에 베팅했다.
한국 금융권에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결단
이날 연설은 한국 금융권에도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기술 인프라와 모바일 금융서비스를 갖고 있다. 디지털자산 거래 규모와 이용자의 관심도 역시 작지 않다. 은행과 증권사, 핀테크 기업들은 블록체인과 토큰증권, 스테이블코인, AI 금융을 꾸준히 연구해왔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다.
누가 장기적인 방향을 정하고, 불확실한 시기에도 책임을 지고 밀어붙일 것인가가 더 큰 문제다.
한국의 금융 혁신은 종종 실무 부서의 실증사업에 머문다. 몇 개월짜리 프로젝트가 끝나면 보고서가 나오고, 담당 임원이 바뀌면 전략도 바뀐다. 규제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기다리고, 시장이 작다는 이유로 투자를 미룬다.
그러는 사이 해외 금융기관은 실제 자산을 발행하고, 결제망을 연결하고, 제도권 상품을 내놓는다.
새로운 금융 인프라는 담당자 몇 명의 열정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최고경영자가 방향을 정하고 기존 사업과 충돌하더라도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장의 수익이 없어도 인프라를 쌓고, 규제당국과 시장을 설득하며, 실패의 책임도 감수해야 한다.
혁신에는 예산보다 후견인이 필요하다.
기타오 회장이 이날 보여준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디지털자산 사업을 젊은 직원에게 맡겨둔 채 멀리서 지켜보는 원로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무대에 올라 방향을 설명하는 현역 경영자의 모습이었다.
기업은 창업자의 나이를 닮는다
기업은 시간이 흐를수록 창업자의 성격보다 조직의 관성을 닮아간다.
보고 체계는 길어지고, 실패에 대한 책임은 커지며, 새로운 사업보다 기존 수익을 지키는 일이 우선된다. 조직이 커질수록 합리적인 이유로 도전을 미루게 된다.
시장 규모가 아직 작다. 규제가 정해지지 않았다. 기술이 완성되지 않았다. 고객 수요가 확인되지 않았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모든 조건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면 이미 시장의 주인이 정해진 뒤라는 점이다.
기타오 회장은 인터넷 금융이 완성된 뒤 진입하지 않았다. 아직 불확실하고 기존 금융권이 회의적이던 시기에 들어갔다. 지금 블록체인과 디지털자산에 접근하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반드시 옳다는 보장은 없다.
디지털자산 산업에는 가격 변동성과 보안 사고, 규제 위험이 존재한다. 블록체인이 모든 금융 인프라를 대체할 것이라는 주장도 지나친 낙관일 수 있다. SBI의 투자와 사업 가운데 실패하는 사례도 나올 것이다.
그러나 미래는 실패하지 않는 기업보다 실패하면서도 다음 기회를 붙잡는 기업에 더 많은 보상을 주곤 한다.
기타오 회장의 힘은 모든 답을 알고 있다는 데 있지 않다.
답이 확실하지 않아도 움직인다는 데 있다.
50분 연설 뒤에 남은 한 장면
행사 마지막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일부 참석자는 자리를 이동했고, 전시장 밖에서는 저녁 행사를 준비하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그러나 기타오 회장은 연설을 이어갔다.
의자에 앉은 채 자료를 넘기고, 오랜 경영 경험과 앞으로의 금융산업에 대한 생각을 설명했다. 예정된 50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무대를 끝까지 채웠다.
그 모습을 보며 혁신이라는 말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혁신은 새로운 기술을 소개하는 일이 아니다. 익숙한 성공 방식을 버릴 수 있는 용기다. 이미 이룬 것이 많아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태도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도 미래를 향한 관심을 놓지 않는 집념이다.
75세의 경영자가 다소 불편한 걸음으로 무대에 올라 블록체인과 디지털금융의 미래를 50분 동안 이야기했다.
그것은 노장의 회고가 아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현역의 선언이었다.
기타오 회장은 은퇴 대신 블록체인을 선택했다. 과거의 성공을 정리하는 대신 다음 금융을 준비했다.
그의 베팅이 성공할지는 시간이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이날 도쿄에서 분명하게 확인된 사실이 하나 있다.
미래는 가장 젊은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끝까지 배우고, 다시 위험을 감수하고, 계속 움직이는 사람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