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2억 달러 쓴 암호화폐 업계, 정치보다 제도를 믿어야
거액의 선거자금도 입법 보장 못 해…정권 바뀌어도 유지될 규칙 세워야
미국 암호화폐 업계가 이번 중간선거에 약 2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우호적인 후보를 당선시키고 비판적인 후보를 떨어뜨려 원하는 법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이 상·하원 다수당 지위를 확보했고, 업계가 거액을 들여 낙선시키려 했던 셰러드 브라운 전 상원의원도 의회 복귀에 성공했다. 정치자금으로 영향력을 키울 수는 있어도 선거 결과와 입법까지 보장받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암호화폐 업계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나선 데는 이유가 있다. 미국에서는 어떤 암호화폐를 증권으로 볼지, 거래소를 어느 기관이 감독할지 등을 놓고 오랫동안 논란이 이어졌다. 기업 입장에서는 어디까지 합법인지 알아야 투자도 하고 사람도 뽑는다.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은 채 문제가 생길 때마다 소송으로 판단하는 방식으로는 산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업계가 법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제도를 만드는 일보다 우호적인 정치인을 확보하는 일에 지나치게 기대게 됐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암호화폐 산업 육성을 내세웠다. 그러나 대통령과 가족이 직접 암호화폐 사업에 뛰어들면서 정책의 명분에 사익 논란이 끼어들었다. 산업을 위한 규제 완화인지, 권력자 가족의 사업을 위한 것인지 묻게 된 것이다. 업계는 대통령의 지원을 얻는 동시에 그의 이해충돌 논란까지 짊어졌다.
암호화폐 감독 체계를 정리하려던 ‘클래리티 법안’이 대표적이다. 어떤 자산을 누가 감독하고 거래를 어떤 기준으로 관리할지 정하는 법안이다. 이 법안은 중간선거 전인 지난 9월에도 상원 심의를 진전시키는 데 필요한 60표를 얻지 못했다. 공화당이 대통령과 상·하원을 모두 차지하고 있을 때도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다. 투자자 보호와 공직자의 사익 추구를 둘러싼 이견을 대통령의 지지만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민주당의 승리를 암호화폐 산업의 패배로 단정할 일도 아니다. 업계가 지원한 후보 상당수는 당선됐고, 민주당 안에도 암호화폐 제도화에 찬성하는 의원들이 있다. 지난해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의 연방 규제 체계를 마련한 ‘지니어스법’도 여야 협력으로 성립했다. 공화당은 무조건 찬성하고 민주당은 무조건 반대한다는 식으로는 미국 정치도, 암호화폐의 미래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선거 직후 비트코인 가격이 하락했다가 반등한 것을 두고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해서도 안 된다. 가격은 금리와 달러 가치, 투자자금의 유입과 유출, 시장의 예상에 따라 움직인다. 예상했던 선거 결과가 나오면서 불확실성이 줄었을 수도 있다. 하루 가격이 올랐다고 규제 문제가 풀린 것도 아니고, 내렸다고 산업의 미래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이번 선거가 업계에 던진 질문은 분명하다. 자신에게 비판적인 정치인이 권력을 잡아도 사업을 이어갈 수 있는가. 대통령이 바뀌고 의회 다수당이 교체돼도 유지될 규칙을 만들었는가. 행정부의 호의로 얻은 혜택은 다음 행정부가 거둬들일 수 있다. 여야가 합의하고 국민이 납득하는 법률이 있어야 기업도 장기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러려면 업계부터 답해야 할 것이 있다. 거래소가 문을 닫아도 고객 자산을 돌려받을 수 있는지, 스테이블코인을 현금으로 바꿔 달라고 하면 실제로 상환할 수 있는지, 발행사와 거래소가 얽혀 투자자에게 손해를 떠넘길 여지는 없는지 설명해야 한다. ‘혁신을 막지 말라’는 주장만으로 이 질문들을 건너뛸 수는 없다. 규제당국 역시 투자자 보호를 명분으로 사업을 무한정 지연시키거나 불분명한 기준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한국도 새겨들어야 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과 자산 토큰화를 논의하면서 누가 발행 권한을 갖고 어느 업종이 시장을 선점할지만 따져서는 곤란하다. 준비자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상환을 어떻게 보장하며, 사고가 났을 때 누가 책임질지부터 분명해야 한다. 기업도 정치권과의 친분을 사업의 안전판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허용과 금지 사이를 오가는 산업에 장기 자금이 들어오기는 어렵다.
암호화폐 업계가 이번 선거에서 배워야 할 것은 정치자금을 더 써야 한다는 교훈이 아니다. 반대하는 정치인과도 합의할 수 있는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을 지켜주는 것은 권력자의 한마디가 아니다. 권력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법과 신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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