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자금세탁방지(AML)와 대북제재 등 ‘제재 준수’ 의무를 암호화폐 업계까지 더 촘촘히 적용하자는 논의가 다시 불붙었다. 전통 금융권은 “규제 공백이 불법자금의 통로가 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크립토 정책 리더들은 “숫자 해석이 과장됐다”며 프레이밍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
논쟁의 중심에는 워싱턴DC 기반 은행정책연구소(BPI)가 최근 공개한 보고서 ‘Time for a Reckoning on AML and Crypto’가 있다. BPI는 시장 구조 입법 논의가 진행되는 현시점이야말로 AML과 제재 체계를 전면 손질해, 은행과 크립토 사업자 간 ‘의무의 비대칭’을 해소할 기회라고 강조했다.
BPI “불법자금·테러자금에 악용 증가…국가안보 이슈”
BPI는 암호화폐와 스테이블코인이 자금세탁범과 테러자금 조달 세력에 더 자주 활용되고 있으며, 은행과 달리 크립토 사업자는 금융시스템 남용을 막기 위한 동등한 법적 의무를 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를 단순한 규제 형평성 문제가 아니라 ‘미국 국가안보’와 직결된 사안으로 규정했다.
보고서는 체이널리시스(Chainalysis) ‘2026 연례 보고서’를 인용해 2025년 불법(일리시트) 암호화폐 주소가 수취한 금액이 1,540억달러(약 227조4,350억원·1달러=1,477.50원)로 전년 대비 162% 증가했다고 적었다. 또 2025년 ‘인신매매’ 의심 서비스와 연관된 거래량이 “확인된 서비스 전반에서 수억달러 규모”로 커졌고, 이는 전년 대비 85% 늘어난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AML 의무 확대 조짐…“중개자 전반으로 확장해야”
BPI는 규제 당국 역시 이미 유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재무부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의 AML·제재 준수 의무를 다루는 ‘규정 제정 예고(NPRM)’를 최근 제시했다는 점을 근거로, 스테이블코인 관련 책임을 은행에 준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흐름이 나타난다고 해석했다.
나아가 BPI는 이런 모델을 거래소 등 다른 크립토 ‘중개자’로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준수(컴플라이언스)를 일부 기업의 경쟁력으로 방치할 게 아니라, 시장 참여자 모두가 동일한 ‘최소 기준선’을 공유해야 법적 적용 범위의 차이를 악용한 불법 활동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다.
코인베이스 “불법 비중 1% 미만…전통 금융의 규모도 함께 봐야”
보고서 공개 직후 크립토 업계에서도 반박이 나왔다. 코인베이스의 최고정책책임자 파리아드 시르자드(Faryad Shirzad)는 BPI가 내세운 “1540억달러”라는 단일 수치에 지나치게 의존해 결론을 끌고 간다고 비판하며, 같은 체이널리시스 보고서가 “온체인 전체 거래에서 불법 활동 비중은 1% 미만”이라고 결론 내린 점을 함께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르자드는 TRM 랩스(TRM Labs)가 불법 비중을 1.2%로 추정하며, 두 곳 모두 불법 비중이 수년간 그 수준(1% 안팎)에서 유지돼 왔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크립토 규제가 불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아니라며,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와 거래소가 AML 투자, 제재 스크리닝, 정보 공유를 강화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시장에서는 앞으로 미국의 AML 기준이 스테이블코인과 거래소 전반으로 확대될지, 그리고 규제 강도가 혁신과 금융안전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을지가 핵심 관전 포인트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