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러시아 제재를 한층 강화하면서 전 세계 가상자산 시장이 ‘분열 국면’에 들어섰다. 동시에 러시아가 서방 스테이블코인에 보복 수수료를 부과하며 양측의 디지털 금융 갈등이 정면 충돌하는 양상이다.
6월 9일(현지시간) EU 집행위원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Ursula von der Leyen)은 21차 대러 제재 패키지를 발표했다. 같은 날 러시아 재무부 차관 이반 체베스코프(Ivan Chebeskov)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경제포럼(SPIEF 2026)에서 테더(USDT)와 USD코인(USDC) 등 서방 스테이블코인에 최대 3%의 ‘징벌적 수수료’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2년간 제기돼 온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 분절’ 우려가 정책으로 현실화된 사례로 평가된다.
EU, 국가 단위 ‘가상자산 차단’ 첫 도입
이번 21차 제재의 핵심은 특정 기업이나 개인이 아닌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가상자산 차단 권한이다. 기존 제재는 특정 거래소나 지갑, 개인을 지정하는 방식이었지만, 이제는 특정 국가의 전체 가상자산 산업을 EU 시장에서 배제할 수 있게 됐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처음으로 제3국 전체의 가상자산 서비스를 금지할 수 있는 수단을 도입한다”며 “러시아의 제재 회피를 돕는 국가에 강력한 억지력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EU는 터키, 아랍에미리트(UAE), 카자흐스탄, 홍콩 등을 러시아 관련 자금 흐름의 ‘중간 허브’로 보고 분석 중이다. 해당 국가가 제재 회피에 실질적으로 기여한다고 판단될 경우, 그 국가와 연결된 모든 가상자산 서비스는 EU와의 거래가 전면 차단된다.
이는 거래소는 물론 유동성 공급자, 결제 인프라까지 포함되는 광범위한 조치다.
러시아, USDT·USDC에 최대 3% 수수료 ‘맞불’
러시아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서방 스테이블코인 사용에 대한 비용을 높여 영향력을 제한하겠다는 전략이다.
특히 테더(USDT)와 USD코인(USDC)은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달러 연동 자산으로, 러시아 내 거래에서도 핵심 결제 수단으로 활용돼 왔다.
이번 조치로 러시아 내 이용자나 기관이 해당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할 경우 최대 3%의 추가 비용이 발생하게 되며, 이는 사실상 ‘탈달러화’ 압박으로 해석된다.
제재 범위 확대…은행·플랫폼까지 포함
EU는 이번 패키지에서 비EU 기관 20곳(은행, 가상자산 플랫폼, 원유 거래업체 등)을 추가로 거래 금지 대상에 올렸고, 러시아 은행 31곳도 제재 대상에 포함했다.
앞서 4월 채택된 20차 제재에서는 이미 러시아 기반 가상자산 서비스 제공업체(VASP)를 전면 금지하고, 러시아 중앙은행이 추진 중인 디지털 루블과 국가 지원 스테이블코인 ‘RUBx’와의 거래를 금지한 바 있다.
이번 조치는 그 연장선이 아니라, ‘제재 회피 구조 자체’를 겨냥한 상위 단계로 평가된다.
가상자산 시장, 국가 단위 리스크 시대 진입
블록체인 분석업체 체이널리시스는 20차 제재를 ‘패러다임 전환’으로 평가했지만, 21차 패키지는 그보다 더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제 가상자산 사업자는 단순히 제재 대상 명단을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특정 거래가 어떤 국가의 ‘정산 생태계’와 연결되는지까지 분석해야 한다.
이는 기존 컴플라이언스 체계로는 대응이 어려운 영역이다.
실제로 2025년 불법 주소로 유입된 가상자산 규모는 1540억 달러(약 234조원)에 달했으며, 이 중 상당 부분이 러시아 연계 흐름으로 추정된다. EU가 강경한 구조적 제재에 나선 배경이다.
이번 EU 제재와 러시아의 맞대응은 가상자산 시장이 더 이상 단일 글로벌 시장이 아니라, 정치와 규제에 따라 분리되는 ‘다극화 시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향후 국가 간 규제 경쟁이 시장 구조 자체를 바꾸는 핵심 변수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