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원이 세계 최대 디지털자산 사기 사건으로 수감 중인 샘 뱅크먼프리드(SBF)의 사면 가능성에 초당적으로 제동을 걸었다.
미 상원은 15일 SBF가 “어떤 경우에도 대통령의 사면이나 감형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결의안(S.Res.772)을 만장일치 동의 방식으로 채택했다. 표결 없이 진행되는 만장일치 동의는 단 한 명의 상원의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 성립한다. 따라서 기록상 ‘100대0 표결’은 아니지만, 공화·민주 양당 모두 반대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 미국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사면권을 제한할 수도 없다. 그러나 상원이 특정 개인의 사면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안 된다”고 공식 선언한 것은 이례적이다.
디지털자산 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온 의원들까지 SBF와 공개적으로 선을 그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디지털자산 지지자 루미스가 앞장섰다
결의안은 공화당의 신시아 루미스 상원의원과 민주당의 루벤 갈레고 상원의원이 공동 발의했다. 두 의원은 상원 은행위원회 산하 디지털자산 소위원회에서 각각 공화당과 민주당을 대표하고 있다.
특히 루미스 의원은 미국 의회에서 가장 적극적인 디지털자산 산업 옹호자로 꼽힌다. 그는 수년간 디지털자산 시장 구조와 스테이블코인 규제 법안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SBF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루미스 의원은 결의안 발의 당시 “그는 법정에서 충분히 재판받았다”고 밝혔다. 갈레고 의원은 더욱 직설적으로 “그를 계속 감옥에 가둬라(Keep him locked up)”라고 말했다.
이는 미국 정치권이 디지털자산 산업의 성장을 지원하는 것과, 고객 자금을 유용한 범죄자를 보호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결의안은 SBF의 징역 25년형이 범죄의 규모와 계획성, 피해자에게 끼친 막대한 손실, 반성 부족을 반영한 결과라고 명시했다. 또 그의 사면은 법치주의와 미국 금융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SBF, 트럼프에게 공식 사면 신청
이번 결의안은 SBF가 지난 6월 8일 미 법무부 사면담당관실에 공식 사면 신청서를 제출한 지 한 달여 만에 나왔다.
법무부 사면 사건 조회 시스템에는 그의 신청이 심사 중인 것으로 등록된 것으로 전해졌다. SBF는 언론 인터뷰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사면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물론이다”라고 답했다.
다만 신청서에 기재된 구제 방식은 ‘형기 종료 후 사면(pardon after completion of sentence)’이다. 이는 통상 형기를 모두 마친 뒤 투표권·배심원 자격 등 시민권을 회복하거나 취업과 면허 취득의 제약을 줄이는 절차다.
현재 복역 중인 형기를 줄이거나 즉시 석방되려면 사면보다 ‘감형(commutation)’을 신청해야 한다. 미 법무부도 복역 중인 수형자는 형기 종료 후 사면이 아니라 감형 신청서를 이용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상원 결의안은 사면과 감형을 모두 반대했다. SBF가 어떤 형태로든 대통령의 행정적 관용을 통해 형사 책임을 줄이는 길을 차단해야 한다는 취지다.
트럼프는 “사면할 생각 없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SBF를 사면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 동안 실크로드 창업자 로스 울브리히트와 바이낸스 창업자 자오창펑을 비롯해 디지털자산 업계와 관련된 인사들에게 사면을 단행했다. 이 때문에 SBF 측도 정치적 환경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고 판단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그러나 트럼프는 SBF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공개적으로 사면 의사가 없다고 밝힌 데 이어 상원까지 초당적으로 반대하면서, 실제 사면 가능성은 더욱 낮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대통령의 사면권은 의회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결의안이 통과됐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이 마음을 바꾸면 법적으로 사면이나 감형을 단행할 수 있다.
이번 결의안은 법적 장벽이라기보다 정치적 경고장에 가깝다. SBF를 사면할 경우 대통령이 공화·민주 양당 전체의 반대를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객 돈을 계열사 금고처럼 사용한 FTX
SBF는 한때 세계 3대 디지털자산 거래소로 성장한 FTX와 계열 트레이딩 회사 알라메다리서치를 동시에 지배했다.
FTX는 고객의 자산을 보관하고 거래를 중개하는 거래소였다. 원칙적으로 고객이 맡긴 자금을 회사 운영이나 자체 투자에 사용해서는 안 됐다.
그러나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SBF가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FTX 고객 자금을 알라메다로 빼돌린 사실이 드러났다. 알라메다는 이 돈을 고위험 거래와 벤처 투자, 정치 후원금, 바하마 부동산 구입, 대출 상환 등에 사용했다.
FTX 시스템에는 알라메다가 일반 고객과 달리 손실이 커져도 자동 청산되지 않도록 하는 예외 기능까지 설정돼 있었다.
문제는 알라메다의 자산 상당 부분이 FTX가 직접 발행한 토큰 FTT로 채워져 있었다는 점이다. 자매회사가 만든 토큰을 담보로 고객 돈을 빌려 투자한 구조였다.
2022년 알라메다의 취약한 재무구조가 공개되자 고객들은 한꺼번에 자금 인출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객 자금은 이미 알라메다를 통해 사용된 뒤였다. FTX는 돈을 돌려주지 못했고 그해 11월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징역 25년·110억 달러 몰수
뉴욕 연방법원 배심원단은 2023년 11월 SBF에게 적용된 사기와 공모 등 7개 혐의에 모두 유죄 평결을 내렸다.
법원은 이듬해 3월 SBF에게 징역 25년과 보호관찰 3년을 선고하고, 110억 달러 규모의 재산 몰수를 명령했다. 검찰은 그가 고객과 투자자, 대출기관의 자금 수십억 달러를 조직적으로 빼돌렸다고 판단했다.
갈레고 의원실은 미국 고객들이 FTX 붕괴로 80억 달러가 넘는 손실을 입었다고 밝혔다. SBF는 재판 이후에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항소와 사면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그의 예정 출소 시점은 2040년대 중반이다.
미국 의회가 던진 메시지
이번 결의안의 핵심은 SBF 개인의 석방 여부에만 있지 않다.
미국은 최근 디지털자산 산업을 제도권 금융에 편입하기 위한 법률과 규제를 빠르게 정비하고 있다. 산업을 키우려면 투자자와 기업이 믿을 수 있는 규칙도 함께 세워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FTX 사태의 책임자가 정치적 사면을 받아 형사 책임을 벗어난다면, 미국이 강조해온 시장 신뢰와 법치주의가 흔들릴 수 있다.
디지털자산 산업을 가장 강하게 지지해온 루미스 의원이 결의안을 주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혁신을 지지한다는 것이 사기를 용인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FTX는 디지털자산 기술이 실패한 사건이 아니었다. 고객 자금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계열사 간 장벽을 허물고, 경영진을 견제할 장치를 없앤 지배구조의 실패였다.
미 상원은 이번 결의안을 통해 분명한 선을 그었다.
디지털자산 산업에는 두 번째 기회를 줄 수 있지만, 고객 돈을 빼돌린 사람에게까지 두 번째 기회를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