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연구진이 외부 자기장이나 극저온 장치 없이도 전자의 스핀을 선택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기술 개발에 성공하면서, 차세대 정보기술의 핵심인 ‘스핀트로닉스’ 분야에 실질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번 연구는 고려대학교 김영근 교수와 서울대학교 남기태 교수 공동 연구팀이 주도했으며, 새로 개발된 ‘키랄 자성 나노나선’ 구조를 통해 전자의 스핀을 특정 방향으로만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기존 스핀트로닉스 기술은 전자의 스핀을 조절하기 위해 강력한 외부 자기장이나 극저온 환경이 필요했는데, 이와 같은 복잡한 조건 없이 상온에서도 스핀을 효율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진전을 의미한다.
스핀은 전자가 가진 양자역학적 속성으로, 상방(업)과 하방(다운)이라는 두 상태를 갖는다. 이 스핀을 제어하는 기술은 전류가 아니라 스핀을 이용해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스핀트로닉스’ 장치 개발의 핵심이다. 이러한 기술은 메모리 기능이 사라지지 않는 비휘발성 메모리(MRAM)와 같은 차세대 반도체 소자에 적용될 가능성이 높아, 글로벌 정보통신 기술 패러다임을 바꾸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연구팀은 금속 이온을 전기화학적으로 환원시키는 결정화 과정에서, 오른쪽 혹은 왼쪽 방향으로 꼬인 키랄(비대칭) 구조를 유도하는 유기분자를 도입함으로써, 입자 수준에서 자성 나노나선을 형성했다. ‘키랄’은 마치 사람의 왼손과 오른손처럼 형태는 유사하지만 대칭이 맞지 않아 거울상처럼 겹칠 수 없는 구조를 의미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성 나노나선은 자체 회전성과 자성 특성을 활용해, 외부 에너지 없이도 스핀을 선택적으로 걸러내고 장거리 이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실험으로 확인됐다.
또한 연구팀은 나노나선이 생성하는 자기장을 이용해 자체적으로 전압을 발생시키는 성질을 측정함으로써, 해당 구조가 실제로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꼬였는지를 정량적으로 평가하는 새로운 분석 방법도 개발했다. 이는 스핀 제어 기술을 상온에서 실용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한층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번 연구 성과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 2025년 9월 5일자에 게재됐으며, 이론으로만 제시됐던 ‘키랄 스핀트로닉스’ 개념을 실험적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연구를 이끈 김영근 교수는 자성재료 자체가 전자 스핀의 정렬을 유도하는 특성을 갖고 있어, 이번 성과로 키랄 구조가 실제 스핀 흐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더 정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으며, 남기태 교수는 금속에서 분자 수준의 꼬임 방향까지 설계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과학적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연구는 향후 스핀 기반 정보소자 개발에 실질적인 토대를 제공할 가능성이 크며, 과학계뿐 아니라 반도체 산업 전반에도 중장기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에너지 소비를 획기적으로 줄이면서도 높은 성능을 실현할 수 있는 저장소자의 개발에도 활용될 수 있어, 관련 기술의 상용화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