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현지 메모리 반도체 생산 확대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면서,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압박이 한층 뚜렷해졌다. 인공지능 확산으로 메모리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는 가운데, 미국은 자국 내 생산 비중을 높여 산업 주도권과 공급망 안정성을 함께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9일(현지시간) 뉴욕주 클레이 타운에서 열린 마이크론 반도체 공장 콘크리트 타설 기념식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끌어들여 생산시설을 짓게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두 회사와 관련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협의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러트닉 장관의 발언은 미국 정부가 단순히 자국 기업 지원에 그치지 않고, 한국과 대만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의 대미 투자를 더욱 적극적으로 유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인 마이크론은 2035년까지 미국 내 반도체 공장과 기술 분야 투자 규모를 2천500억달러, 우리 돈 약 375조원 이상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는 뉴욕 공장 신설 비용과 아이다호·버지니아주 공장 확장 비용이 포함된다. 마이크론은 특히 뉴욕 공장의 첫 콘크리트 타설을 당초 계획보다 한 분기 이상 앞당겼다고 밝혔다. 회사는 이런 투자를 바탕으로 자사 디램 생산의 40%를 미국에서 맡기고, 미국 전역에서 9만개 이상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반도체 공장은 건설에만 그치지 않고 장비, 소재, 부품, 물류, 전력 인프라까지 동반 수요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지역경제 파급효과가 크다.
이번 발표는 트럼프 행정부의 산업정책과도 맞닿아 있다. 미국 정부는 임기 말까지 전 세계 반도체 생산의 40%를 미국 내에서 담당하겠다는 구상을 내세우고 있다. 마이크론도 이에 맞춰 미국 내 생산 확대 계획을 계속 키워왔다. 당초 1천700억달러 투자 계획에서 지난해 6월 2천억달러로 늘린 데 이어, 이번에 다시 500억달러를 추가했다. 또 미국 반도체 공급망 생태계 강화를 위해 최대 30억달러를 별도로 투입하고, 이 가운데 5억달러는 대만 글로벌웨이퍼스의 텍사스주 웨이퍼 생산시설 확장에 지원하기로 했다. 웨이퍼는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기초 재료로, 이런 지원은 완성품 생산뿐 아니라 기초 공급망까지 미국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움직임이 메모리 경쟁 구도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최근 고대역폭 메모리(HBM·인공지능용 고성능 메모리) 시장이 빠르게 커지면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의 경쟁이 한층 치열해진 상황이다. 특히 마이크론의 투자 발표 시점이 SK하이닉스의 10일 나스닥 미국주식예탁증서(ADR) 상장을 앞둔 때와 맞물렸다는 점에서, 시장 주도권 경쟁을 의식한 행보라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로 이날 마이크론 주가는 장중 9% 넘게 올랐다가 상승폭을 줄였지만, 정규장은 전날보다 4.5% 오른 991.64달러에 마쳤다.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케이엘에이, 램리서치, 암 등 다른 반도체 관련 종목도 3~9% 상승했다.
결국 미국은 보조금과 정책 지원, 시장 규모를 앞세워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생산 거점을 자국으로 옮기려 하고 있고, 한국 기업들은 비용 부담과 고객 접근성, 지정학 위험을 함께 따져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 같은 흐름은 앞으로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의 투자 결정이 단순한 수요 전망을 넘어, 각국 정부의 산업정책과 공급망 전략에 따라 좌우되는 방향으로 더 강해질 가능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