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에서 정확성은 생명과 직결되는 요소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진료 현장에서는 환자의 주관적인 증상 호소와 의사의 판단에만 크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오진이나 부적절한 치료로 이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이에 따라 AI와 정밀 데이터를 중심으로 ‘추측 없는 의료’가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특히 자폐증, 관절 근골격계 질환, 암, ADHD 등에 AI 분석 기반의 예측·진단 기술이 본격 적용되면서 의료 현장의 판이 달라지고 있다.
예컨대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공지능이 단순한 진료 의뢰서만을 바탕으로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를 식별할 수 있었고, 이는 환자를 조기에 전문가에게 연결하는 데 효과를 보였다. 의료진들은 이제 방대한 헬스 데이터를 이용해 질병을 조기에 찾고, 환자 맞춤형 치료 계획을 구현하며, 진료 효율성도 끌어올리고 있다.
AI 기반의 정밀 기술이 의료현장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마주하게 된 첫 번째 장벽은 낡은 IT 인프라다. 2024년 기준 미국 의료업계는 여전히 연간 약 90억 건에 달하는 팩스를 전송하고 있으며, 전자 의료 기록(EMR)이 보급됐음에도 여전히 다른 산업보다 기술 수용 속도가 더디다. 과거 수십억 달러가 투입된 디지털 헬스 앱 스타트업들이 기대에 못 미쳐 실패한 경험도 신기술 도입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실패한 이유는 과도한 목표 설정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의료 혁신은 '작은 문제부터 해결하기'에서 시작해야 지속 가능성이 생긴다는 교훈이다. 이는 단순 앱 개발이나 혈액검사 전면 혁신보다, 의료진의 구체적인 진단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춘 기술이 시장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대표적 사례로, 근골격계 데이터를 집약해 정밀 분석 AI를 제공하는 밸드(Vald)처럼 10년간 5,400만 개 이상의 데이터를 축적해 인공지능 벤치마크 모델을 확보한 기업들이 주목받고 있다. 유전체 분석기업 파운데이션 메디슨(Foundation Medicine)은 암환자의 80만 건 이상 유전체 정보를 담은 데이터셋을 통해 AI 알고리즘으로 생존률 예측 모델도 개발했다. 웨어러블 제조사 오우라(Oura)는 전 세계 35개국 22만 명의 수면 데이터를 기반으로 수면 패턴 차이를 분석해 맞춤형 건강 조언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처럼 축적된 특화 데이터를 활용하면 단순 진단을 넘어 예측과 예방의 시대가 열린다. 예컨대 파운데이션 메디슨은 플랫아이언 헬스(Flatiron Health)와 협업해 20개 암 유형의 7만 8,000여 명 환자 사례를 분석, 생존과 직결되는 유전자 변이를 700개 이상 도출했다. 이는 기존 ‘반응적 치료’에서 나아가 선제적 치료 전략으로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자폐 치료 역시 더 이상 감정적 인상에 기반하지 않는다. 특정 행동의 유무와 빈도, 지속시간 등을 정량적으로 평가하는 치료법인 ABA(응용행동분석)는 AI 및 웨어러블 장치를 활용한 데이터 기반 맞춤 치료로 진화 중이다. 과거 단순 관찰에 의존하던 접근이 이제는 행동 패턴 분석으로 최적의 개선 경로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결국 향후 디지털 헬스 산업의 핵심은 정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예측 시스템 구축에 있다. 근골격계 AI 기업 밸드의 예를 들면, 향후 축구선수가 발목 부상을 당했을 시, 의료진은 웨어러블 기기로 측정한 점프력과 가동범위의 수치를 인공지능 모델과 대조해 약 8주 내 회복 예측을 할 수 있다. 이후 회복 과정에서는 지속적인 데이터 분석을 통해 치료 계획을 실시간 조정하고, 심지어 보험 청구 코드까지 자동화되리라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 의료비 지출의 약 12%가 근골격계 질환 치료에 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처럼 정밀 예측이 가능한 AI 솔루션의 가치는 막대하다. 최근 IPO에 성공한 힌지 헬스(Hinge Health)의 사례는 시장이 다시 디지털 헬스에 기대를 거는 분위기임을 방증한다.
궁극적으로 AI와 데이터, 디바이스의 통합은 단발성 진단의 정확도 향상에서 그치지 않는다. 의료의 전체 흐름을 사후 진료 중심에서 사전 예방 관리 중심으로 전환시킴으로써, 환자가 더 낮은 비용으로 더 나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의료 혁신은 단순한 기술 공급을 넘어 임상의 판단 체계를 실질적으로 바꾸는 근본적 진화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