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도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둘러싼 논의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디지털 자산 시장의 성장과 함께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도입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자연스럽게 “누가 발행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등장한다. 많은 정책 논의는 은행 중심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한국 금융산업의 역사에서 은행이 주도하는 모델이 항상 혁신을 만들어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증권업에서 드러난 은행계 금융기관의 특성을 떠올려 보면, 스테이블코인의 미래 역시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한국 금융권에서는 오래전부터 은행계 증권사와 독립 증권사의 성격 차이가 뚜렷했다. KB증권이나 신한투자증권 같은 은행계 증권사는 안정성과 리스크 관리에 강점을 보였지만, 공격적인 투자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서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다. 반면 미래에셋증권이나 한국투자증권 같은 독립 금융그룹의 증권사는 해외 투자, 대체자산, 자기자본 투자 등에서 훨씬 빠르게 움직이며 산업의 확장을 주도했다.
이 차이는 단순한 경영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의 DNA와도 관련이 있다. 은행은 본질적으로 예금을 보호해야 하는 기관이며, 규제 환경 또한 강하다.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다. 반면 증권업은 투자와 딜, 그리고 새로운 시장 개척이 핵심이다. 두 조직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차이를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대입해 보면 몇 가지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첫째, 은행 주도 스테이블코인은 안정성에서는 높은 신뢰를 확보할 가능성이 크다. 은행이 발행한다는 사실 자체가 지급 준비금과 규제 감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민간 기업이나 스타트업이 발행하는 코인보다 신뢰하기 쉬울 것이다.
둘째, 그러나 혁신 속도는 느려질 가능성이 있다. 은행이 발행하는 스테이블코인은 사실상 ‘디지털 예금’에 가까운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결제나 송금 기능은 제공하겠지만, 탈중앙 금융(DeFi)이나 글로벌 디지털 자산 생태계와의 연결은 매우 제한적으로 접근할 것이다. 이는 리스크 관리와 규제 준수 때문이다.
셋째, 시장 구조 자체가 보수적으로 형성될 수 있다. 은행 중심 모델이 자리 잡으면 새로운 플레이어의 진입은 어려워진다. 이는 초기 안정성을 높이는 대신 장기적으로는 혁신 경쟁을 약화시킬 수 있다. 과거 금융산업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반복됐다. 증권업에서는 독립 금융회사들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동안 은행계 증권사는 주로 기존 고객 기반을 활용한 자산관리 사업에 집중했다.
결국 스테이블코인 정책의 핵심은 “안정성과 혁신 사이의 균형”이라는 오래된 질문으로 돌아온다. 은행이 발행하면 안정성은 확보된다. 그러나 그 안정성이 지나치게 강해질 경우, 새로운 디지털 금융 생태계가 성장할 공간은 줄어들 수 있다.
한국 금융산업의 경험은 하나의 교훈을 보여준다. 안정적인 기관이 항상 혁신을 주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스테이블코인이 단순한 디지털 결제 수단에 머무를지, 아니면 새로운 금융 인프라로 발전할지는 결국 누가 이 시장을 이끌게 되느냐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