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 투자자의 온체인 대출 시장 진입이 본격화되면서 디파이(DeFi) 대출 구조가 단일 풀 중심에서 리스크를 분리하는 모듈형 아키텍처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타이거리서치(Tiger Research)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과 최근 온체인 대출 시장 사례를 비교한 결과, 특정 자산의 부실이 시스템 전반으로 번지는 구조적 취약성이 전통 금융과 디파이 모두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됐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온체인 신용 시장의 경쟁 축도 단순 유동성 공급에서 ‘리스크 격리’와 ‘운용 레이어’ 역량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의 출발점은 위기 국면에서 드러난 단일 풀 구조의 취약성이다. 2008년 9월 세계 3위 머니마켓펀드(MMF)였던 리저브 프라이머리 펀드는 전체 자산의 1.2%에 불과한 리먼브라더스 채권 손실로 기준가가 1달러 아래로 무너지며 대규모 환매 사태를 겪었다. 이틀 만에 400억달러 규모의 환매 요청이 몰렸고, 결국 인출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번졌다. 타이거리서치는 이 사건이 특정 자산의 부실이 전체 시스템 위기로 증폭되는 메커니즘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고 짚었다.
이후 전통 금융은 리스크를 ‘분리’하는 방향으로 구조를 바꿨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2014년 MMF 제도를 개편해 자금 성격에 따라 유형을 나누고 유형별 완충 장치를 설계했다. 헤지펀드 업계 역시 단일 중개기관 의존에서 벗어나 멀티 프라임 브로커리지 체계를 도입하며 자산 수탁, 담보 관리, 신용 공급, 리스크 감시 기능을 분산했다. 자본시장에서 위험이 한 곳에 집중되지 않도록 레이어를 잘게 나누는 방식이 제도권 표준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반면 초기 디파이는 이러한 중간 레이어를 스마트 계약 하나로 압축하는 데 집중했다. 비용 절감과 자동화 측면에서는 효율적이었지만, 모든 신용·담보·청산 기능이 단일 프로토콜에 집약되면서 리스크 역시 한곳에 모였다. 그 결과 특정 자산의 가격 급변이나 청산 실패가 전체 유동성 위기로 번질 가능성이 커졌고, 프로토콜 거버넌스는 담보 자산 채택 기준을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트코인(BTC), 이더리움(ETH) 같은 대형 자산 외에는 대출 시장 편입이 제한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 문제를 가장 먼저 구조적으로 건드린 사례로는 사일로 파이낸스가 거론된다. 자산별로 독립된 대출 풀을 구성해 특정 담보 자산에서 문제가 발생해도 다른 풀로 전염되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다. 이는 디파이 대출 시장이 거대한 통합형 풀에서 자산 단위 리스크 격리 구조로 이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했다. 특히 토큰화 국채, 사모 크레딧 등 실물자산(RWA)이 온체인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이 흐름은 더 빨라졌다. RWA는 거래 시간, 가격 피드, 규제 요건, 청산 방식이 자산마다 달라 동일 파라미터로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디파이도 전통 금융과 유사하게 ‘인프라 레이어’와 ‘운용 레이어’를 구분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청산과 결제는 불변의 코드가 담당하고, 위험 자산 선별과 노출 관리, 파라미터 조정은 별도 운용 주체가 맡는 식이다. 보고서는 이 같은 변화가 단순 기술 개선이 아니라 기관 자금 수용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해석했다.
대표 사례로는 모포(Morpho)가 꼽힌다. 모포 블루는 담보 자산, 대출 자산, 담보인정비율, 가격 피드, 금리 모델 등을 시장 생성 시 고정하는 불변형 인프라 프로토콜로 설계됐다. 반면 실제 자산 선별과 공급 한도 조정은 모포 볼트의 큐레이터가 담당한다. 즉 코드가 실행을 책임지고, 사람이나 기관이 리스크를 판단하는 분업 구조다. 이는 전통 금융의 프라임 브로커리지와 유사한 방식으로 해석된다.
다만 분업 구조에는 새로운 과제도 따른다. 프로토콜 자체가 수탁 기능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코인베이스(Coinbase), 앵커리지(Anchorage) 등 외부 수탁기관과의 연동이 필요하고, 리스크 관리는 큐레이터의 품질에 크게 좌우된다. 실제로 2025년 xUSD·스트림 파이낸스 관련 손실 사례는 일부 큐레이터의 자산 선별 실패가 곧바로 볼트 성과 악화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후 기관 자금은 스테이크하우스, 건틀릿, 센토라 등 검증된 리스크 큐레이터 위주로 집중되는 흐름을 보였다.
기관 채택도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코인베이스와 바이낸스는 각각 자사 대출 인프라 뒷단에 모포 블루를 활용하고 있으며, SG포지는 MiCA 규제를 준수하는 스테이블코인 EURCV와 USDCV를 배치했다. 아폴로(Apollo)는 사모 크레딧 펀드 ACRED를 온체인 담보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고, 빗와이즈는 직접 리스크 큐레이션에 참여하고 있다. 타이거리서치(Tiger Research)는 이를 두고 토큰화가 자산 접근성을 열었다면, 모포는 그 자산을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온체인 신용 통로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아베(Aave) V4는 또 다른 길을 택했다. 완전한 격리 구조 대신 허브 앤드 스포크 구조를 통해 리스크 통제와 자본 효율성을 동시에 겨냥했다. 허브는 유동성과 회계를 통합 관리하고, 스포크는 자산별 독립 파라미터를 가진 개별 차입 시장으로 기능한다. 특정 스포크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허브가 설정한 크레딧 라인 범위 안에서만 영향이 미치도록 제한하는 방식이다. 이는 전통 금융의 유니버설 뱅크가 사업부별 신용 한도를 관리하는 메커니즘과 유사하다.
이 구조는 RWA 확장에 특히 유리하다는 평가다. 새로운 토큰화 자산 시장이 초기에 독자 유동성을 끌어모으기 어렵더라도, 기존 허브 유동성을 바탕으로 시장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베의 기관용 RWA 레이어인 호라이즌은 이러한 방향성을 반영한다. 발행사가 KYC·AML을 담당하고, 라마리스크가 자산 실사와 파라미터를 제안하며, 체인링크(Chainlink)가 가격 피드를 제공하고, 프로토콜은 실행만 맡는다. 자산 편입과 리스크 관리 권한이 일반 DAO에서 기능별 전문 주체로 분산되는 구조다.
오일러(Euler) V2는 보다 유연한 연결형 모델을 제시한다. 2023년 1억9700만달러 규모의 익스플로잇을 겪은 뒤 단순 복구가 아니라 아키텍처 재설계를 택했고, 이후 EVK와 EVC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기관형 신용 인프라를 구축했다. EVK는 자산별 독립 리스크 설정이 가능한 신용 볼트를 만들 수 있게 하고, EVC는 서로 다른 볼트의 담보와 부채를 하나의 계정 단위로 연결한다. 독립성과 연결성을 동시에 확보한 구조로, 전통 금융의 멀티 스트래티지 헤지펀드 포드 구조와 비슷한 면이 있다는 분석이다.
오일러의 활용 범위도 빠르게 넓어지고 있다. 온도 파이낸스와 협력해 SPYon, QQQon, TSLAon 등 토큰화 주식을 담보로 받고 페이팔 스테이블코인 PYUSD를 대출 자산으로 제공하는 ‘STEY’ 마켓을 출시했다. 또 KPK의 USDC 프라임 RWA 볼트에서는 밴에크의 토큰화 국채 VBILL과 시큐리타이즈 AAA 등급 CLO인 STAC를 담보로 활용한다. 이런 구조는 자산별 가격 산정 방식과 청산 규칙이 상이한 RWA를 온체인 대출 자산으로 편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결국 모포, 아베, 오일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관 투자자의 요구에 대응하고 있지만 공통점은 분명하다. 실행 인프라와 리스크 판단 기능을 분리하고, 자산별로 맞춤형 위험 조건을 설계하는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포가 ‘속도와 선택권’, 아베가 ‘자본 효율성’, 오일러가 ‘유연한 리스크 균형’에 방점을 찍고 있을 뿐, 디파이 시장의 진화 방향은 이미 정해졌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보고서는 앞으로의 핵심 경쟁이 프로토콜 자체보다 ‘운용 레이어’에서 벌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전통 금융에서도 프라임 브로커리지 인프라가 성숙한 뒤 헤지펀드 운용 역량 경쟁이 본격화됐듯, 온체인 대출 시장 역시 인프라 표준화 이후 리스크 설계와 담보 심사, 규제 대응, 트랙레코드 확보가 성패를 좌우할 것이란 관측이다. 현재 온체인 큐레이션 볼트 총 운용자산은 약 74억달러 수준으로 집계된다.
특히 전통 금융과 달리 온체인 인프라는 특정 기관의 허가 없이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방성이 압도적이다. 과거 프라임 브로커리지 시장을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같은 대형 기관이 장악했다면, 디파이에서는 누구나 모포나 오일러 위에 시장을 열고 전략을 설계할 수 있다. 타이거리서치는 이 같은 구조 변화가 디파이와 RWA 융합의 본질이며, 향후 온체인 신용 시장의 승자는 단순한 프로토콜이 아니라 ‘리스크를 가장 잘 운용하는 주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