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2.0이 본격적으로 산업을 달구던 2000년대 중반,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 트루벤처스(True Ventures)는 기술 혁신의 물결을 포착하며 시장에 출항했다. 당시 공동창업자 존 캘러핸(Jon Callaghan)과 필 블랙(Phil Black)은 API와 매시업을 기반으로 한 신종 소비자·기업용 애플리케이션 생태계를 내다봤고, 이를 투자 기회로 전환하기 위해 세계 최대 규모의 시드 펀드를 조성했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지금, 트루벤처스는 AI라는 또 다른 기술 대전환의 파고 위에 올라서 있다.
트루벤처스는 현재 AI를 모든 산업 디지털 전환의 핵심 인프라 층으로 간주하며, 이를 바탕으로 창업 환경이 과거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자본 집약도가 낮아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은 2015년 이후 80건 이상의 AI 중심 스타트업에 투자했으며, 그 범위는 엔터프라이즈 테크, 로보틱스, 생물학, 소비재 등 전 산업 영역을 관통한다.
트루벤처스 창립자인 존 캘러핸은 지금이 기업가 정신이 폭발하는 특별한 시기라고 말한다. 이전과 달리 소규모 팀이 빠르게 제품을 만들고, 대기업에 납품할 기회를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동사의 파트너 푸닛 아가왈(Puneet Agarwal)은 "일부 대기업에서는 IT 예산 전체를 AI에 배정하고 있다"며 시장 흐름의 본질적인 변화 양상을 짚었다.
AI 플랫폼 구축을 위한 글로벌 자본지출 규모는 이미 2~3조 달러(약 2,880조~4,320조 원)에 달하며, 엔비디아(NVDA) 젠슨 황 CEO는 2030년까지 추가적으로 3~4조 달러(약 4,320조~5,760조 원)가 투입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캘러핸은 이 자본지출 위에 구축되는 애플리케이션 계층이 기술로써 기하급수적인 가치를 창출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는 “기술이 자체적으로 코드를 생성하고 제품을 만들어내는 시대”라며 기존 플랫폼 기반의 수직계열화와는 확연히 다른 판이 형성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트루벤처스는 ‘투자 기간’ 관점에서 현재를 분석한다. 지금 당장 유망한 회사보다는 5~10년 후 시장을 장악할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철학이다. 특히 팬데믹 기간 중 형성된 제로금리 환경처럼 왜곡된 자본 흐름이 아니라, 기술 주도 혁신이 현재 AI 투자 열풍의 본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대학 리쿠르팅 AI 플랫폼 핸드셰이크, 코드 업그레이드를 자동화하는 모데른, AI 기반 신약개발 기업 엔베다, 아바타 비서 플랫폼 하위, 기독교 콘텐츠 챗봇 바이블챗 등이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독창적인 기술력과 시장 적합성을 갖춘 초기 기업들이며, 몇몇은 이미 1억 달러 이상 매출을 달성하거나 유니콘 반열에 오른 상태다.
트루벤처스는 현재까지 운용 자산 40억 달러(약 5조 7,600억 원)를 관리 중이며, 파트너 9명이 공동 검토 방식으로 투자 의사결정을 내린다. 특히 이들 포트폴리오의 60~70%는 창업자와 기존 관계를 통한 '추천' 경로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네트워크 기반 발견 역량이 돋보인다.
현재 시장이 일제히 유망 AI 스타트업 몇 곳에만 자금을 과잉 투입하는 합의형 투자 환경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캘러핸과 아가왈은 거대한 기술 변곡점은 일시적인 거품보다는 지속가능한 시장 확장을 만든다고 강조한다. 특히 시장의 총 유효 시장 규모(TAM)는 더 빠르게 커지고 있으며, 경쟁 강도 자체보다는 시장 파이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캘러핸은 이를 “우리가 늘 과소평가했던 꼬리 효과와 분포 곡선의 면적이 지금 다시 드러나고 있다”는 말로 요약했다.
지금은 어떤 의미에서 벤처 투자자와 창업가 모두에게 가장 매혹적인 시기일 수도 있다. 아가왈은 “지금 이 시점이야말로 창업가 또는 벤처캐피털리스트로서 이상적인 시기”라며, 시장이 커다란 기술 지각변동을 맞이할 때야말로 진정한 성과가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이 ‘AI의 시대’는 지금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