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카드 네트워크가 핀테크 혁신을 흡수하며 결제 시장 지배력을 유지해온 전략이 스테이블코인 영역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14일 포브스에 따르면 미국과 글로벌 결제 시장을 장악해온 신용카드 네트워크들은 스테이블코인의 성장 가능성을 위협이 아닌 기회로 보고 자사 결제 생태계에 통합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비자와 마스터카드, 그리고 일부 측면에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까지 포함한 카드 기업들은 강력한 네트워크 효과를 기반으로 결제 시장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해왔다. 거의 모든 가맹점에서 카드 결제가 가능하다는 점이 소비자 사용을 유도하고, 소비자 사용 확대는 다시 가맹점 수용을 늘리는 구조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방대한 결제 인프라와 높은 전환 비용, 은행과의 깊은 연결 구조가 카드 네트워크의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탈중앙화 암호화폐는 지금까지 카드 네트워크에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비트코인 등 주요 암호화폐는 가격 변동성이 커 결제 수단으로 적합하지 않았고 카드 결제에서 제공되는 소비자 보호 기능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카드 사용자들은 빠른 거래 처리 속도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네트워크 혼잡이 발생하는 비트코인에서는 이러한 속도를 기대하기 어렵다.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상황이 다르다. USDC와 USDT 같은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등 법정화폐에 가치가 연동돼 변동성이 거의 없고 퍼블릭 블록체인을 통해 전 세계에서 거의 즉시 자금 이동이 가능하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결제 수단으로서 활용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같은 이유로 비자와 마스터카드는 스테이블코인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 두 회사는 디지털 화폐 사용이 확대되더라도 결제 흐름이 자사 네트워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중개자 역할을 확보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비자는 카드 기업뿐 아니라 전체 금융 서비스 업계에서도 스테이블코인 분야의 초기 선도 기업으로 평가된다. 비자는 2020년부터 USDC 기반 결제 정산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2021년에는 자사 재무 운영 과정에서 USDC 활용을 시험했다. 2023년에는 일부 고객이 결제 의무를 USDC로 정산할 수 있도록 하는 파일럿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비자는 스테이블코인을 기존 금융 시스템과 블록체인을 연결하는 전략적 인프라로 보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위협으로 인식하는 중국과 달리 비자는 법정화폐 기반 디지털 자산을 새로운 결제 레일로 활용해 자금 이동 속도와 투명성, 효율성을 높이려는 접근을 취하고 있다. 2025년 11월 기준 비자의 월간 스테이블코인 정산 규모는 연환산 기준 약 35억 달러 수준을 넘어섰다.
2025년 12월에는 글로벌 결제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은행 대상 스테이블코인 정산 프로그램을 출시했다. 이는 미국 금융기관이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결제 정산을 수행하는 첫 본격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초기 참여 은행은 크로스리버뱅크와 리드뱅크이며 이들은 솔라나 블록체인 기반 USDC를 활용해 비자와 결제 정산을 진행하고 있다. 비자는 2026년까지 미국 내 서비스를 확대할 계획이다. 비자 글로벌 성장 제품 및 전략 파트너십 총괄 루바일 비르와드커는 “은행 파트너들이 단순히 관심을 보이는 수준이 아니라 실제 사용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스테이블코인 정산을 확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스터카드 역시 스테이블코인에 적극적이지만 접근 방식은 다소 다르다. 비자가 자체 제품과 결제 인프라를 중심으로 스테이블코인을 통합하는 전략을 취한다면 마스터카드는 다양한 암호화폐 플랫폼과 협력을 통해 디지털 자산을 기존 금융 시스템에 점진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마스터카드는 전 세계 1억5000만 개 이상의 가맹점 네트워크를 활용해 암호화폐 시장의 파편화와 신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사용자가 스테이블코인을 카드 결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면 암호화폐 지갑과 현실 경제 사이의 연결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소비자는 마스터카드가 허용되는 모든 가맹점에서 디지털 자산을 사용할 수 있으며 가맹점은 스테이블코인으로 직접 정산을 받을 수 있어 즉시 유동성 확보와 빠른 결제 처리, 낮은 거래 비용이라는 이점을 얻을 수 있다.
마스터카드는 여러 파트너십을 통해 스테이블코인 생태계를 확대하고 있다. 글로벌 결제 인프라 기업 투네스(Thunes)와 협력해 스테이블코인 기반 지급 서비스를 확대했으며 이를 통해 우버와 딜리버루 같은 플랫폼이 국경을 넘어 노동자에게 지급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또한 피서브(Fiserv)와 협력해 FIUSD 결제를 지원하고 문페이(MoonPay)와 협력해 암호화폐 지갑에서 직접 마스터카드 결제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외에도 팍소스(Paxos)와 USDG 지원을 위한 협력을 진행하고 있으며 서클(Circle)과는 가맹점이 USDC로 결제를 정산할 수 있도록 하는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반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보다 신중한 접근을 택하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카드 네트워크 중 하나인 아멕스는 빠른 확산보다 규제 준수와 리스크 관리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아멕스의 전략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이유는 비즈니스 모델 차이 때문이다. 비자와 마스터카드는 카드 네트워크 중심 사업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아멕스는 네트워크와 카드 발행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아멕스 수익 모델은 결제 수수료와 고소득 고객 기반에 크게 의존하며 스테이블코인은 구조적으로 직불 결제에 가까운 성격을 가진다. 아멕스 포인트 같은 보상 프로그램 역시 이러한 결제 수수료에서 재원이 마련되는데 스테이블코인 생태계에서는 동일한 구조가 형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스테이블코인이 확산되더라도 아멕스 핵심 수익 모델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국경 간 결제는 스테이블코인의 잠재적 활용 분야지만 이는 비자나 마스터카드에 비해 아멕스에게 상대적으로 중요한 수익원이 아니다.
한편 스테이블코인 시장 자체는 최근 둔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26년 3월 기준 전체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축소 흐름을 보이고 있으며 테더(USDT) 공급량은 1월 이후 감소세를 나타냈고 USDC 성장도 둔화되고 있다. 이는 시장 유동성이 줄어들고 있음을 의미하며 일부 투자자들이 스테이블코인을 보유하기보다 다시 법정화폐로 전환하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암호화폐 낙관론자들은 과거에도 이러한 시장 침체가 반복돼 왔으며 이후 시장이 더 크게 성장해 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2011년 이후 암호화폐 시장은 네 차례의 ‘크립토 겨울’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이블코인 열기가 식더라도 카드 네트워크 기업들의 지배력은 크게 흔들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스테이블코인이 약화되더라도 비자와 마스터카드의 핵심 비즈니스 모델은 여전히 견고하며 블록체인 기반 결제 스타트업이 카드 네트워크를 대체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이 성공하든 쇠퇴하든 카드 네트워크 기업들은 이미 이를 결제 시스템 안으로 흡수하는 전략을 통해 시장 주도권을 유지할 준비를 마쳤다는 평가가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