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업계 최대 DAO(탈중앙자율조직) 거버넌스 플랫폼을 이끌어온 태리(Tally)가 결국 문을 닫는다. 최고경영자(CEO) 데니슨 버트럼(Dennison Bertram)은 “바이든 행정부 시절이 지금보다 업계에 오히려 ‘좋았다’”고까지 말하며, 규제 환경 변화와 생태계 성장 둔화가 동시에 거버넌스 툴 수요를 말려버렸다고 진단했다.
태리는 아비트럼(ARB), 유니스왑, 이더리움네임서비스(ENS) 등 주요 프로토콜을 포함해 500개가 넘는 DAO의 온체인 거버넌스를 지원해왔다. 버트럼은 18일(현지시간) 블로그를 통해 6년간 이어온 사업을 단계적으로 종료하겠다고 밝혔다.
DAO는 전통 기업처럼 이사회나 경영진이 의사결정을 내리는 구조가 아니다. 토큰 보유자가 수수료 구조부터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까지 투표로 결정한다. 다만 현실에서는 참여율이 낮고 의사결정이 느려 ‘소수의 적극적 유권자’가 수십억 달러 규모 시스템의 방향을 좌우하는 일이 잦다. 태리는 이런 한계를 보완하려고 투표 인프라, 위임(델리게이션) 도구, 거버넌스 대시보드 등 이른바 ‘크립토 민주주의’의 레일을 제공해왔다.
버트럼은 코인데스크와의 인터뷰에서 거버넌스 툴 시장을 떠받치던 두 축, 즉 ‘규제 리스크’와 ‘탈중앙 애플리케이션 생태계의 확장’이 동시에 약해졌다고 말했다. 규제 위협이 완화되자 굳이 돈을 들여 탈중앙 거버넌스를 유지할 유인이 줄었고, 이더리움 중심 생태계가 수천 개 프로토콜로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란 기대도 현실화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최근 사례도 이런 흐름을 뒷받침한다. 어크로스 프로토콜은 DAO를 아예 해산하고 미국 C-코퍼레이션(일반 주식회사)으로 전환하자는 제안을 내놓으며, 토큰 기반 구조가 기관 파트너십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소식이 전해진 뒤 ACX 토큰 가격은 80% 급등했다. 지난해에는 솔라나 기반 거래소 주피터와 NFT 기업 유가랩스도 DAO 구조를 접었고, 그렉 솔라노(Greg Solano) 유가랩스 CEO는 당시 거버넌스를 “느리고 시끄럽고, 종종 진지하지 않은 ‘거버넌스 연극’”이라고 혹평했다.
‘겐슬러 리스크’가 만든 탈중앙화, 이제는 선택지가 됐다
버트럼이 특히 강조한 대목은 규제 해석의 변화다. 게리 겐슬러(Gary Gensler) 체제의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특정 집단이 토큰 가치에 영향을 주는 ‘관리적 의사결정’을 주도하면 하위테스트(Howey Test)상 증권으로 분류될 위험이 커진다는 해석을 밀어붙였다. 업계는 이를 피하기 위해 의사결정을 DAO로 “밖으로 밀어내는” 전략을 택했고, 수천 개 지갑으로 권한을 분산해 “누가 네트워크를 운영하는지 특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방식이 확산됐다. 이때 거버넌스 시스템과 태리 같은 도구는 단순 기능이 아니라 ‘법적 방어 전략’의 일부였다.
하지만 버트럼은 지금의 분위기가 정반대라고 본다. 트럼프 행정부가 “문제될 게 없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신호를 강하게 보내면서, 기존 조직들이 전통 기업 모델로 운영해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란 기대가 커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탈중앙화는 ‘필수 조건’이 아니라 ‘선택 사항’으로 내려앉았고, 많은 팀이 비용을 내고 거버넌스를 유지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무한 정원은 없었다” 이더리움 생태계 확장 베팅의 실패
규제 환경 변화만이 태리를 접게 만든 건 아니다. 태리의 사업모델은 이더리움 생태계가 ‘끝없이 확장’하며, 수많은 프로토콜과 애플리케이션이 거버넌스 인프라를 필요로 할 것이란 두 번째 가정 위에 서 있었다. 버트럼은 “유니스왑이나 에이브(AAVE), L2(레이어2) 한두 개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그 정도 규모라면 결국 ‘프로토콜 거버넌스 툴’이 아니라 제한된 고객을 상대로 한 컨설팅 사업에 가까워진다고 했다.
이 ‘무한 정원’ 가설은 태리가 지난해 800만 달러(약 119억 원)를 조달할 때 핵심 투자 논리로도 제시됐다. 당시 시장에서는 “수천 개의 L2가 생길 것”이란 전망에 큰 반박이 없었지만, 버트럼은 이제 “가까운 시일 내 수천 개 L2는 없고, 어쩌면 끝내 없을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업계는 소수의 지배적 프로토콜을 중심으로 빠르게 ‘통합’됐고, 거버넌스 인프라 기업이 먹고 살 만큼 풍부한 신규 수요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버트럼은 암호화폐가 결제나 예측시장 같은 투기·베팅형 영역에서 제품-시장 적합성(product-market fit)을 일부 찾았지만, 거버넌스 인프라 비즈니스를 지속시킬 만큼 두꺼운 소비자 애플리케이션 층은 끝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봤다. 그는 폐업을 알리는 글에서 “탈중앙 프로토콜을 위한 거버넌스 툴링은 벤처 투자가 가능한 사업이 아니다.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고 못 박았다.
‘AI 내러티브’에 밀린 크립토, “더는 ‘초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버트럼의 진단은 거버넌스 시장을 넘어 업계 전반으로 확장된다. 그는 AI가 “미래의 새 내러티브”가 됐고, 그 서사가 크립토보다 훨씬 크고 포괄적이어서 인재와 자본을 빨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가장 뛰어난 인재가 몰리는 곳에서 창업자와 빌더가 탄생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크립토가 ‘가장 흥미로운 기회의 무대’ 자리를 내줬다는 위기감이 깔려 있다.
그럼에도 그는 업계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늘 ‘아직 초기’라고 말하지만, 나는 2011년부터 이 업계에 있었다”며 “솔직히 더 이상 초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태리의 종료는 한 기업의 실패라기보다, 규제와 내러티브, 생태계 성장률이 맞물리며 ‘탈중앙 거버넌스’가 필수 인프라에서 선택적 비용 항목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읽힌다.
🔎 시장 해석
- DAO 거버넌스 툴의 수요는 ‘기술 필요’보다 ‘규제 회피(법적 방어)’ 동기가 컸는데, 미국 규제 기조가 완화되며 탈중앙화가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뀌면서 시장 자체가 축소됨
- 이더리움 생태계가 ‘수천 개 프로토콜·L2로 확장’할 것이라는 전제가 빗나가고, 소수 대형 프로토콜 중심으로 통합되며 신규 고객 풀이 충분히 커지지 않음
- AI가 더 큰 내러티브로 자본·인재를 흡수하면서, 크립토(특히 거버넌스 인프라)는 성장 기대 대비 매력도가 하락하는 구간에 진입
💡 전략 포인트
- 프로젝트 운영 관점: DAO 유지가 ‘규제 방어’ 목적이 약해진 만큼, 의사결정 속도·파트너십·법적 구조(재단/법인/C-Corp)까지 포함해 거버넌스 비용 대비 효용을 재산정할 필요
- 투자/토큰 관점: DAO → 법인 전환 이슈는 단기적으로 ‘기관 친화성’ 기대를 만들 수 있으나(ACX 사례), 장기적으로는 토큰 권리·수익모델·거버넌스 권한 축소 리스크를 함께 점검해야 함
- 빌더/인프라 관점: 거버넌스 툴은 ‘규모의 경제’가 약하므로, 범용 SaaS만으로는 한계가 크고 (1) 보안/컴플라이언스, (2) 위임·대표제 강화, (3) 오프체인-온체인 결합(포럼·시그·집행) 같은 고부가 영역으로 재포지셔닝이 필요
📘 용어정리
- DAO(탈중앙자율조직): 토큰 보유자 투표로 주요 의사결정을 하는 조직 형태
- 온체인 거버넌스: 블록체인 상에서 제안·투표·(일부)집행까지 처리하는 방식
- 델리게이션(위임): 토큰 보유자가 자신의 투표권을 대표자에게 위임하는 제도
- 하위테스트(Howey Test): 자산이 ‘증권’인지 판단하는 미국 법리 기준
- L2(레이어2): 이더리움 등 메인체인 확장성을 높이기 위한 보조 네트워크
- C-코퍼레이션(C-Corp): 미국의 일반 주식회사 형태(전통 기업 지배구조)
💡 자주 묻는 질문 (FAQ)
Q.
태리(Tally) 폐업은 DAO에 어떤 의미가 있나요?
태리는 500개+ DAO의 투표·위임·대시보드 등 ‘거버넌스 표준 도구’를 제공해온 플랫폼입니다. 이번 종료는 DAO 거버넌스가 기술적으로 가능하더라도, 규제·수요·수익성 측면에서 “항상 유지해야 하는 필수 인프라”가 아니라 “필요할 때만 쓰는 선택 비용”으로 재평가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Q.
규제가 완화되면 왜 오히려 DAO 수요가 줄어드나요?
과거 SEC가 “특정 팀이 토큰 가치에 영향을 주는 의사결정을 주도하면 증권성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는 해석을 강조하자, 프로젝트들은 권한을 DAO로 분산해 ‘운영 주체를 특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규제 압박이 약해지면, 비용과 시간이 드는 DAO 운영(낮은 참여율·느린 의사결정)을 굳이 유지할 유인이 줄어 전통 법인 구조로 회귀하려는 흐름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Q.
앞으로 DAO는 사라지고 전통 기업만 남게 되나요?
완전 소멸이라기보다 ‘역할 재정의’에 가깝습니다. 규제 방어 목적의 형식적 탈중앙화는 줄어들 수 있지만, (1) 자금 배분(그랜트), (2) 프로토콜 파라미터 변경, (3) 커뮤니티 소유/브랜드 운영처럼 DAO가 효율적인 영역은 남습니다. 다만 대형 프로젝트일수록 의사결정 속도와 책임 소재를 위해 대표제·위임 강화 또는 법인과의 하이브리드 구조가 늘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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