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 시장에서 '고수익'이라는 단어만으로 투자자를 설득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2025년 한 해 가상자산 해킹 피해액은 21억 달러를 돌파하며 역대 최악의 보안 위기를 기록했고, 바이비트 해킹 사건은 약 15억 달러 규모의 피해로 업계 역사상 최대 단일 해킹 사건으로 남았다. 올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2026년 4월에는 켈프 다오(Kelp DAO)가 2억 9,200만 달러 상당의 해킹 피해를 입었고, 드리프트 2억 8,500만 달러, 스텝 파이낸스 약 3,000만 달러 등 도난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루나 사태 이후 보수화된 국내 투자자들에게 이러한 흐름은 '디파이 수익률'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수익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리고 원금은 무엇이 지켜주는가.
■ 디파이의 다음 단계, '실물자산 담보'로 이동하는 자금
이 질문에 대한 시장의 응답 중 하나가 실물자산(RWA) 담보 대출이다. 토큰 가격이나 알고리즘이 아니라 장비, 차량, 부동산 같은 실물 담보가 대출을 뒷받침하는 구조다. RWA.xyz에 따르면 토큰화된 실물자산 시장은 2025년 이후 6배 성장했으며, 보안 사고가 반복될수록 "추상적 토큰 메커니즘이 아닌 실물 경제활동에 기반한 수익"을 찾는 자금 이동이 빨라지고 있다는 평가다.
유럽은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선 시장으로 꼽힌다. 은행 대출 문턱이 높은 유럽 중소기업(SME)에 개인 투자자가 직접 자금을 공급하고, 담보와 법적 회수 절차로 원금을 보호하는 P2B(Peer-to-Business) 크라우드렌딩이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 스위스 매클리어의 웹3 확장판 '8lends'…무엇이 다른가
이 카테고리의 유럽 플레이어 중 하나가 스위스 핀테크 매클리어(Maclear AG)다. 매클리어는 스위스 자금세탁방지(AML) 체계에 따라 자율규제기구(SRO)인 폴리레그(PolyReg)의 회원사로 등록돼 있으며, 개인 투자자와 유럽 기업을 연결해 담보부 비즈니스 대출에 투자할 기회를 제공한다. 회사 측 발표 기준 누적 펀딩 규모는 1억 400만 유로(약 1,500개 프로젝트)를 넘어섰고, 6년 운영 기간 동안 디폴트는 단 1건으로 이마저도 법적 절차를 통해 원금과 이자가 전액 회수됐다고 밝히고 있다.
8lends는 이 매클리어가 2025년 선보인 온체인 확장판이다. 베이스(Base) 블록체인 위에서 운영되는 P2P 크라우드렌딩 플랫폼으로, 웹3 투자자와 중소기업을 연결하는 RWA 섹터에 속한다. 구조는 단순하다. 투자자는 코인베이스 월렛이나 메타마스크 등 베이스 지원 지갑을 연결해 최소 100 USDC부터 투자하며, 이자는 매월 지급되고 원금은 대출 만기에 일괄 상환된다. 플랫폼 수수료는 없으며 베이스 네트워크 가스비만 부담한다.
회사가 내세우는 차별점은 세 가지다.
첫째, 실물 담보다. 모든 대출은 장비·차량·부동산·원자재 등 실물 담보로 뒷받침되며, 차주는 매클리어가 재무 안정성, 신용 이력, 담보 유동성 등 40개 이상 내부 기준으로 수행하는 다층 실사를 거친다. 회사 측은 대출 신청 기업의 약 90%가 이 과정에서 탈락한다고 설명한다.
둘째, 바이백(BuyB) 보호 장치다. 차주의 상환 지연 발생 시 첫 30~60일간 매클리어가 해당 기업과 문제 해결에 나서고, BuyB 배지가 붙은 프로젝트의 경우 투자자는 원금 100%를 돌려받으며 지연 전까지 수령한 이자도 그대로 보유한다. BuyB가 없는 프로젝트는 매클리어가 담보 회수 절차에 착수해 매각 대금을 투자자에게 비례 배분한다.
셋째, 고정 수익률이다. 회사 측 발표 기준 현재 중앙값 APR은 약 23%, 목표 범위는 18~25%다. 모든 거래는 USDC를 기반으로 이뤄지며, 별도 플랫폼 토큰을 구매할 필요가 없다. 회사 측은 스마트 컨트랙트가 서틱(CertiK)과 사이버스코프(Cyberscope)의 감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 국내 투자 환경과 비교하면…기회와 한계 함께 봐야
국내 투자자 관점에서 이 모델은 거래소 스테이킹(연 3~10% 수준 변동 수익)이나 국내 디파이 풀과 비교할 때 수익률 격차가 크고, 토큰 가격 변동 리스크가 구조적으로 차단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온체인 투명성도 강점이다. 투자·지급·이자 등 모든 거래가 공개되며, 프로젝트별 결제 내역에서 트랜잭션을 블록체인 익스플로러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균형 있게 짚어야 할 지점도 분명하다. 첫째, 폴리레그는 자금세탁방지(AML) 규정 준수를 감독하는 자율규제기구로, 그 자체가 투자자 예금보호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스위스 'SRO 회원사'와 은행 수준의 건전성 규제는 구분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둘째, 8lends는 국내 온라인투자연계금융업법(온투법)의 적용을 받는 등록 업체가 아닌 해외 플랫폼으로, 분쟁 발생 시 국내 투자자 보호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 셋째, 투자금은 대출 만기까지 잠기는 구조로 중도 유동성이 제한된다. 연 20%대 수익률은 유럽 중소기업 대출이라는 실물 위험을 인수하는 대가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사례가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다. 해킹과 디페깅으로 신뢰를 잃은 디파이가 '실물 담보·법적 회수·규제 준수'라는 전통 금융의 문법을 흡수하며 진화하고 있고, 그 진원지가 유럽이라는 점이다. 국내 투자자에게 전통적 디파이 스테이킹 바깥에도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선택지를 평가하는 기준은 결국 '담보의 실재성'과 '회수 구조의 법적 구속력'이라는 점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