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가 미국과 유럽의 금융 모델을 답습하는 대신, 해외송금·통화주권·금융 접근성 등 현지의 실질적인 필요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디지털 금융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규제와 실증을 넘어 토큰화 자산, 스테이블코인 결제, 인공지능(AI) 에이전트 금융 등 실제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동남아가 글로벌 디지털자산 산업의 ‘실전 무대’로 부상하고 있다.
글로벌 블록체인·인공지능·콘텐츠 벤처캐피털 해시드의 정책 싱크탱크 해시드오픈리서치는 태국 대표 금융지주회사 SCBX와 함께 이 같은 분석을 담은 <필요가 만든 제도: 동남아시아 디지털 자산의 선택과 실제> 보고서를 지난 22일 발간했다. 이번 보고서는 지난 5월 방콕에서 열린 ‘동남아시아 블록체인 위크 2026’의 기조연설과 비공개 라운드테이블 논의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은 동남아시아 블록체인 위크는 해시드와 자회사인 샤드랩, SCBX가 함께하는 동남아시아 대표 블록체인 행사다.
보고서는 비자·마스터카드를 비롯한 글로벌 결제기업과 동남아 주요 금융사들이 차세대 디지털 금융의 실험 무대로 동남아를 주목하고 있는 현상에 주목했다. 2024년 6월부터 2025년 6월까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온체인 거래 규모는 1조 4,0000억 달러에서 2조 3,600억 달러로 약 68% 증가했다. 해시드오픈리서치는 동남아가 더 이상 서구의 금융 모델을 그대로 답습하는 시장이 아니라, 지역의 실질적인 필요에 따라 자체적인 디지털 금융 생태계를 구축하는 시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하나의 동남아, 두 개의 상반된 디지털 금융 전략
보고서는 동남아시아 6개국의 디지털자산 전략을 크게 ‘공세적’ 접근과 ‘방어적’ 접근으로 구분했다.
싱가포르·태국·말레이시아는 제도권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자국통화 기반의 디지털 금융시장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싱가포르는 규제 기반 싱가포르달러화 스테이블코인 생태계를 확대하고 있으며, 태국은 중앙은행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바트화 기반 스테이블코인과 프로그래머블 결제를 실증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역시 링깃화 기반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예금 도입을 추진하는 한편, 이슬람 금융과 토큰화의 결합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고 있다.
반면 베트남·인도네시아·필리핀은 개인을 중심으로 먼저 성장한 디지털자산 시장을 제도권으로 편입하고 달러화 확산을 억제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연간 약 2,000억 달러 규모의 온체인 거래가 이뤄지며,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자본 통제 환경에서 달러 가치 저장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연간 약 350억 달러에 달하는 해외 노동자 송금이 유입되는 가운데, 스테이블코인이 기존 금융망을 보완할 새로운 송금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독자적 토큰화 생태계 개척…”상업은행 설득이 성공의 관건”
보고서는 동남아에서 기존 오프체인 금융 시스템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웠던 문제를 블록체인과 토큰화를 통해 해소하는 실사례들이 등장하고 있다고 짚었다. 대표적인 움직임 중 하나가 말레이시아의 이슬람 금융과 토큰화의 결합이다. 말레이시아는 국부펀드 카자나 나시오날과 함께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기반한 채권인 수쿠크(Sukuk)의 토큰화를 추진하며, 조 단위 달러 규모의 글로벌 이슬람 금융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라운드테이블에서는 기존 금융 구조에서는 단순 보관에 머물렀던 금 자산에 토큰화를 접목해 새로운 수익과 유동성을 창출하는 사례도 소개됐다. 토큰화 금 펀드의 자금을 금 소매업체에 담보대출해 이자 수익을 창출하는 한편, 토큰화된 펀드 지분을 통해 기존 금 펀드에서는 어려웠던 월중 유통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동남아 각국의 토큰화 생태계 구축에 한국 금융사가 주요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교보증권은 SCBX의 자회사 토큰엑스, 싱가포르의 SBI디지털마켓과 손잡고 와인 실물자산을 토큰화하는 국경 간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한국과 태국, 싱가포르의 금융·디지털자산 인프라를 연결한 사례로, 동남아에서 구축되는 토큰화 금융 생태계에 한국 금융사가 직접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보고서는 토큰화 시장의 본격적인 상용화를 가로막는 예상 밖의 병목으로 규제가 아닌 상업은행의 참여 부재를 지목했다. 싱가포르달러화 기반 토큰화 국채 펀드는 무디스로부터 더블A 등급을 획득하고도 충분한 투자 수요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후 상품성을 개선한 후속 프로젝트에서도 은행 인프라 확보가 사업화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규제 승인을 받더라도 계좌 개설과 결제·수탁 등 기존 금융 인프라를 제공하는 상업은행이 참여하지 않으면 토큰화 상품을 실제 시장에 출시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특히 보고서는 상업은행들이 아직 토큰화 상품의 충분한 사업성을 확인하지 못해 관련 인프라 제공에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토큰화 사업자는 규제당국의 승인뿐 아니라 상품 설계 초기부터 상업은행의 참여 가능성과 사업적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1센트 미만 결제 시대…AI 에이전트 위한 새 금융 인프라
라운드테이블에서는 인공지능과 웹3의 융합도 핵심 의제로 다뤄졌다. 특히 인공지능 에이전트가 인간의 개입 없이 서로 서비스를 구매하고 대금을 지급하는 ‘에이전트 대 에이전트(A2A)’ 상거래가 확산될 경우, 기존 금융 인프라로는 처리하기 어려운 새로운 결제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됐다. 인공지능 에이전트가 만들어낼 1센트 미만의 초소액·초고빈도 거래는 기존 신용카드망으로 처리하기에는 비용 부담이 큰 만큼, 가스비를 없애거나 수수료를 예측 가능한 수준으로 설계한 전용 블록체인 결제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인공지능과 블록체인을 결합한 실제 금융 인프라 구축 사례도 소개됐다. 아발란체는 넷플릭스·애플·아마존·스포티파이 등의 국내 결제를 처리하는 한국 전자지급결제대행사(PG)가 가맹점 대상 스테이블코인 정산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맹점이 자연어로 자금 배분을 지시하면 인공지능이 이를 스마트컨트랙트로 변환해 정산을 자동으로 집행하는 구조다. 글로벌 결제기업 비자와 마스터카드 역시 젊고 디지털 수용성이 높은 동남아 소비자층에 주목해 이 지역을 새로운 디지털 금융 서비스의 테스트베드로 활용하고 있다.
김서준 해시드 대표는 “기계와 소프트웨어가 사람의 개입 없이 수행하는 A2A 상거래가 향후 B2B 및 B2C에 버금가는 독립적인 경제 영역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호진 샤드랩 대표는 “동남아는 단순히 트래픽이나 이용자가 많은 시장이 아니라 가치를 창출하는 중심지”라며 “동남아 시장은 고객 중심에서 개발자와 창업가가 주도하는 시장으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보고서를 공동 발간한 SCBX의 카위웃 템푸와팟(Kaweewut Temphuwapat) 최고혁신책임자(CIO) 겸 SCB 10X 대표는 “우리는 특정 기관이나 투자자만을 위해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금융 접근성을 누릴 자격이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금융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 전문은 해시드오픈리서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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