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제재 대상에 오른 이란·러시아·북한 등이 국제 금융 제재를 우회하는 수단으로 가상자산 사용을 크게 늘리면서, 지난해 관련 자금 규모가 1천억달러, 우리 돈 약 153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분석됐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이 4일 현지시간 보도한 내용을 보면, 블록체인 분석업체 체이널리시스는 제재 대상과 연결된 암호화폐 주소들이 2025년 한 해 동안 받은 자금이 1천억달러를 돌파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전년보다 거의 8배 늘어난 수준이다. 가상자산은 거래 상대방의 신원을 파악하기 쉽지 않고, 서방 제재의 핵심 통로인 기존 은행망을 거치지 않고도 자금을 옮길 수 있다는 점에서 제재 대상국들에 유리한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실제 활용 방식도 점점 구체적이고 조직적으로 바뀌고 있다. 미국이 테러단체로 지정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는 텔레그램 등을 통해 암호화폐 기부를 요청해 온 것으로 파악됐고,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정보원을 통해 자금 수취 방식을 확인했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국내외 암호화폐 거래소를 활용해 최대 원유 구매국인 중국에 대한 원유 판매 대금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 금융망에서 사실상 배제되자 가상자산 기반 결제 수단을 더 정교하게 활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의 경우 제재 대상 국영은행 프롬스뱌즈방크와 몰도바 출신 재벌 일란 쇼르 측이 지난해 루블화 가치에 연동한 토큰 A7A5를 발행해 해외 결제에 활용한 정황이 포착됐다. 이 토큰을 스테이블코인(법정화폐 등에 가치를 연동해 가격 변동성을 줄인 가상자산)으로 바꾼 자금이 중국 드론 판매업체 결제에 쓰였다는 분석도 나왔다. A7A5는 지난해에만 거래량 기준 900억달러 이상이 처리된 것으로 추산된다. 러시아는 또 제재 대상 원유를 밀수하는 선원들의 급여 지급에도 가상자산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역시 해킹 등 사이버 범죄로 빼낸 암호화폐를 연료와 군사 장비 구매에 활용해 온 것으로 서방 당국은 보고 있다.
미국도 최근 수년간 제재 대상국과 테러단체가 이용한 암호화폐 지갑을 압류하고, 관련 거래소를 제재하는 방식으로 단속 강도를 높여 왔다. 지난달에는 이란 최대 거래소 노비텍스를 포함한 이란 거래소 4곳을 제재했고,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미국이 이란으로부터 10억달러 규모의 가상자산을 압류했다고 밝혔다. 다만 전문가들은 가상자산 생태계가 매우 빠르게 바뀌고, 나라별 규제 수준도 제각각이어서 단속만으로 전체 흐름을 막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TRM랩스의 아리 레드보드 정책책임자는 최근 제재를 받은 이란의 가상자산 플랫폼들이 눈에 띄는 일부 거점일 뿐이라며, 겉으로 드러난 플랫폼을 무너뜨려도 그 아래 연결망까지 한꺼번에 해체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흐름은 앞으로도 제재와 회피 수단 사이의 추격전이 더 치열해지는 방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