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이달 들어 1,500원 안팎까지 빠르게 내려오자 달러를 저가에 사두려는 수요가 몰리면서 5대 시중은행의 달러예금 잔액이 단기간에 9조원 가까이 불어났다.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달러예금 잔액은 지난 9일 기준 709억400만달러로 집계됐다. 이는 2022년 12월 말 744억1천600만달러 이후 약 3년 6개월 만의 최대 규모다. 원화로는 9일 오후 3시 30분 환율 1,501.4원을 적용할 때 약 106조4천억원 수준이다. 달러예금은 3월 말 587억6천300만달러에서 4월 말 618억1천700만달러, 5월 말 629억8천900만달러, 6월 말 650억4천400만달러로 꾸준히 늘었는데, 이달 들어서는 7거래일 만에 58억6천만달러가 증가해 6월 한 달 증가액 20억5천600만달러의 약 2.8배에 달했다.
이번 증가세는 개인과 기업 수요가 함께 밀어 올린 것으로 풀이된다. 개인 달러예금은 9일 기준 122억2천만달러로 6월 말 119억7천600만달러보다 2억4천400만달러, 약 2% 늘었다. 환율이 높게 올랐던 시기에는 차익 실현 등으로 두 달 동안 8억1천300만달러가 줄었지만, 환율이 내려오자 다시 매수세가 붙은 것이다. 실제로 이달 들어 5대 은행의 원화에서 달러로 바꾸는 일평균 환전 금액은 793만달러로, 6월 일평균 408만달러보다 크게 늘었다. 환율이 떨어지면 같은 원화로 더 많은 달러를 살 수 있어 개인들 사이에서는 이를 매수 기회로 보는 경향이 강해진다.
기업의 달러 보유도 계속 확대됐다. 기업 달러예금은 9일 기준 586억8천500만달러로 6월 말 530억6천800만달러보다 56억1천700만달러, 약 11% 증가했다. 이 역시 2022년 12월 말 620억5천400만달러 이후 가장 큰 규모다. 기업들은 수입 대금 결제, 해외 투자, 환 리스크 관리(환율 변동에 따른 손실을 줄이기 위한 대응) 때문에 외화를 일정 수준 쌓아두는 경우가 많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런 목적의 외화 보유 수요가 계속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최근에는 달러 강세가 한풀 꺾일 수 있다는 전망이 퍼지면서 일부 기업이 달러를 다시 팔기 시작한 정황도 나타나고 있다.
환율 하락의 배경에는 시장 심리 변화와 대규모 외화 유입 전망이 함께 작용했다. 원/달러 환율은 이달 초 1,560원에 육박했다가 60원 가까이 떨어졌고, 지난 11일 오전 6시 종가는 1,498.5원으로 전날보다 11.0원 내렸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던 지난 2일 주간거래 종가 1,555.8원보다 57.3원 낮은 수준이다. 지난 8일에는 장중 1,498.1원까지 내려가며 한 달여 만에 1,500원 아래로 떨어졌다. 시장에서는 외환당국 개입에 대한 경계감이 커진 데다, SK하이닉스의 미국주식예탁증서, 즉 ADR 나스닥 상장을 앞두고 선물환 매도로 추정되는 물량이 환율을 끌어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ADR 공모가를 기준으로 총 265억700만달러, 약 40조원을 조달했는데 이는 지난달 우리나라 무역수지 흑자 약 362억달러의 70%를 넘는 규모다.
국제금융센터는 최근 보고서에서 SK하이닉스가 외환시장 충격을 줄이기 위해 조달 자금을 한꺼번에 들여오기보다 일정 기간에 걸쳐 나눠 유입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상장을 앞두고 진행된 선물환 매도가 이미 환율 하락에 영향을 줬다는 진단도 내놨다. 민경원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SK하이닉스의 ADR 상장으로 하루 10억달러에 이르는 신규 달러 유동성 공급이 예상된다며, 이는 수출업체와 중공업체의 선제적 달러 매도까지 유도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런 흐름은 앞으로도 환율 하락 기대와 저가 매수 심리가 맞물리면서 개인의 달러 매수는 이어질 수 있지만, 기업 쪽에서는 대규모 외화 유입과 정책 신호에 따라 달러 매도 움직임이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