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투자 시장에서 소형 펀드들이 예전처럼 빠른 의사결정과 전문성만으로 경쟁 우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대형 펀드들이 민첩한 전략을 채택하고 분야별 전문가들을 적극 영입하면서, 기존의 틈새 전략은 더 이상 소형 펀드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것이다.
2024년 기준으로 단 30개의 대형 벤처펀드가 전체 투자액의 약 75%를 차지했다는 통계는 이 같은 현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초기 성공을 바탕으로 선순환 구조에 진입한 대형사의 경우, 유망 스타트업을 더 빨리, 더 많이 확보하며 경쟁자를 따돌리고 있다. 결국 벤처 투자업계에서는 자금 규모뿐 아니라 선제적 접근이 갈수록 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창업가 입장에서 자금은 어디에서나 비슷해 보일 수 있다. 따라서 투자 전문성보다 창업 초기부터 구축한 신뢰관계가 더욱 결정적인 차별화 요인이 되고 있다. 초기 단계에서 스타트업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펀드가 나중에 경쟁이 붙었을 때도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는 셈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12년 이니셜라이즈드 캐피털(Initialized Capital)의 코인베이스(Coinbase) 초기 투자다. 700만 달러 규모의 첫 펀드에서 30만 달러(약 4억 3,000만 원)를 투자한 이 벤처사는 당시 주변의 회의적인 시선을 무릅쓰고 암호화폐 분야에 선제적으로 베팅했다. 이후 2021년 코인베이스의 IPO 시점 기준으로 이 투자 지분의 가치는 24억 달러(약 3조 4,560억 원)로 폭등했다.
최근 성공적인 소형 펀드는 단순히 돈을 제공하는 ‘수표 쓰는 투자자’가 아닌, 창업가 여정에 실질적으로 관여하는 ‘동반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다. 이들은 엑셀러레이터, 엔젤 투자자, 업계 인사들과의 관계를 사전에 구축하고, 기업 설립 초기에 실질적인 인맥 연결과 인재 채용 지원까지 제공하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특히 AI, 바이오테크처럼 경쟁이 치열한 분야에서도 의미 있는 차별화는 가능하다. 대형 연구소, 전략적 대기업, 기술 파트너 등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통해 스타트업이 시장에서 신뢰를 얻도록 돕는 것이 대표적인 방법이다. 예컨대 엔비디아(NVDA), 마이크로소프트(MSFT) 등과의 조기 연계는 벤처 라운드 이전부터 기업 가치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결국 핵심은 사고방식의 전환이다. 소형 펀드는 이제 단순한 자본 제공자가 아니라, 생태계의 네트워크 허브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창업가와 일정 전 함께하며 긴밀한 관계를 먼저 구축한 펀드가 진짜 기회를 선점한다.
벤처 투자 시장에서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성공하는 소형 펀드는 규모가 아니라, 얼마나 앞서 신뢰를 확보하고 그 기반 위에 전략적 지원을 이어가는지가 관건이다. 소형 펀드도 여전히 승산은 있다. 다만 기존 공식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