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조세심판원이 상징적인 결정을 내렸다. 해외에 법인을 설립한 국내 블록체인 기업에 한국 법인세를 부과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판정이었다. 이번 결정은 법인의 설립지가 아니라 실질적 경영관리 장소(Place of Effective Management)가 과세 기준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주었다. 실제 경영이 서울에서 이루어졌다면, 법인 주소가 어디든 한국 기업이라는 논리다. 업계에서는 당혹스러운 반응이 나왔지만, 사실 이 결정은 예고된 것이었다. 간판만 바꿨을 뿐, 몸통은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으니까.
해외 법인 설립은 오랫동안 업계의 공공연한 우회로였다. 국내 규제를 피하고 토큰 발행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의사결정은 서울에서 이루어졌고, 개발팀은 강남 오피스에 앉아 있었으며, 창업자의 생활 기반 역시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주소지만 바뀌었을 뿐, 무게중심은 그대로였다. 조세심판원은 그 무게중심을 정확히 짚었다.
진짜 해외 진출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1970~80년대 태권도 사범들을 보면 된다. 서울 도장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생존을 위해 짐을 쌌다. 브라질로, 독일로, 미국 소도시로 흩어졌다. 현지어를 배우고, 제자를 키우고, 그 제자가 다시 사범이 됐다. 국가의 기획이 아니었다. 절박한 개인들이 몸을 던져 만든 바텀업 네트워크였다. 그 불편함과 단절이 태권도를 올림픽 종목으로 만든 토대가 됐다.
차이는 명확하다. 규제를 피하려는 탈출은 한국을 등진 척하면서 한국에 기댄다. 반대로 진짜 탈출은 한국을 등지는 대신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린다.
지금 블록체인 업계에 필요한 것은 싱가포르 법인 등기가 아니다. 그곳에서 실제로 살아남는 일이다. 현지 규제를 공부하고, 현지 투자자를 설득하고, 현지 커뮤니티 안에 자리를 잡는 것. 강남 오피스에 앉아서는 결코 이 일을 해낼 수 없다. 태권도 사범들이 그랬듯, 몸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간판만 바꾸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 중간은 없다. 남아서 치열하게 버티거나, 아니면 나가서 확실히 자리 잡아야 한다. 조세심판원의 결정은 시작에 불과하다. 역외조항은 아직 본격적으로 작동하지도 않았다. 해외에 설립된 법인이라도 국내 이용자를 상대로 영업한다면 국내 규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글자크기
가
가
가
가
싱가포르의 머라이언 석상
<저작권자 ⓒ TokenPos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