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전쟁이 촉발한 호르무즈 해협 위기가 글로벌 기축통화 질서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유조선 통행료의 위안화 결제 요구, 각국 중앙은행의 미 국채 대규모 매도, 사우디의 중국 주도 CBDC 플랫폼 참여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1974년 이래 달러 패권을 떠받쳐온 페트로달러 체제가 사상 최대의 구조적 도전에 직면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페트로달러란 무엇인가 — 50년 패권의 해부
페트로달러 체제를 이해하려면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 태환을 전격 중단하면서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됐고, 미국은 달러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장치가 필요했다. 그 해답이 1974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비밀 협약이었다.
핵심 내용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했다. 사우디는 모든 석유 거래를 달러로만 결제하고, 원유 수출로 얻은 달러 잉여분을 미국 국채 등 미국 자산에 재투자한다. 미국은 그 대가로 사우디 왕정의 안보를 보장하고, 호르무즈 해협을 포함한 페르시아만의 자유 항행을 군사력으로 담보한다. 이 합의는 이후 쿠웨이트, UAE, 카타르 등 걸프 국가 전반으로 확산됐다.
이 체제가 달러 패권에 미친 영향은 가히 구조적이었다. 석유는 모든 현대 산업의 핵심 생산 투입재다. 정유, 석유화학, 비료,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헬륨까지 — 걸프산 원유와 가스에 의존하지 않는 제조업 공급망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어떤 나라든 원유를 수입하려면 달러가 필요했고, 달러 수요는 인위적으로 부풀려진 상태로 유지됐다. 도이체방크는 최근 보고서에서 "세계가 달러로 저축하는 이유는 달러로 결제하기 때문"이라며 "달러의 국제 교역 지배력은 사실상 페트로달러 위에 세워져 있다"고 분석했다.
이 구조가 미국에 안겨준 특권은 '과도한 특권(exorbitant privilege)'으로 불린다. 달러 수요가 구조적으로 유지되는 한, 미국은 사실상 무제한에 가깝게 달러를 발행해도 인플레이션 압력을 외부로 수출할 수 있다. 1971년 금본위제 폐기 이후 미국이 수십 년간 지속해온 적자 재정과 국채 발행의 근저에는 이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호르무즈, 달러 패권의 물리적 병목
문제는 이 체제가 호르무즈 해협이라는 단 하나의 물리적 병목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잇는 이 해협의 최협부는 폭이 불과 33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좁은 수로를 통해 전 세계 원유 해상 교역량의 약 20%, 하루 약 1,700만 배럴이 통과한다. 사우디, UAE, 쿠웨이트, 이라크, 이란의 원유 수출이 모두 이 해협에 의존한다.
이란은 이 지리적 현실을 오랫동안 전략 카드로 활용해왔다. 미국과의 갈등이 고조될 때마다 이란은 해협 봉쇄 가능성을 언급해왔으며, 실제로 기뢰 부설 능력과 대함 미사일, 소형 쾌속정 전술을 결합한 비대칭 해전 능력을 꾸준히 고도화해왔다.
현재 진행 중인 이란 전쟁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이 이란의 군사 역량을 상당 부분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도이체방크를 비롯한 복수의 분석 기관은 이란이 여전히 해협을 선택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충분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더 결정적인 것은 이란이 전면적 봉쇄가 아니라 '선택적 통과 허가'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점이다. 중국 위안화로 통행료를 납부하고 이란의 허가를 받은 선박에 한해 통과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전면 봉쇄보다 훨씬 정교하다. 전면 봉쇄는 미국의 즉각적이고 압도적인 군사 대응을 정당화하지만, 선택적 허가는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허가의 대가가 위안화 결제라는 점에서, 이란은 미국과의 군사적 충돌 없이 페트로달러 체제에 쐐기를 박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페트로위안의 부상 — 중국의 10년 포석
중국은 이 기회를 즉흥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다. 페트로위안 프로젝트는 10년에 걸친 치밀한 포석의 결과다.
2018년 3월, 중국은 상하이 국제에너지거래소(INE)에서 위안화 표시 원유 선물 계약 거래를 개시했다. 이는 단순한 금융상품 출시가 아니라, 달러가 독점해온 원유 가격 결정 메커니즘에 위안화를 끼워 넣겠다는 명시적 도전이었다. 초기 거래량은 미미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산 원유의 달러 결제가 봉쇄되면서 위안화 원유 거래는 급격히 성장했다.
더 주목할 움직임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행보다. 사우디는 2024년 중국인민은행이 주도하는 다자간 CBDC 결제 플랫폼 mBridge에 공식 참여했다. mBridge는 달러 기반 국제결제시스템(SWIFT)을 우회해 각국 중앙은행 디지털화폐로 직접 결제하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프로젝트다. 페트로달러 체제의 핵심 파트너인 사우디가 달러 결제 인프라의 대안을 모색하는 플랫폼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가 상징적인 신호다.
도이체방크는 이 흐름이 이란 전쟁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러시아·이란산 원유 제재가 역설적으로 위안화 기반 역외 원유 거래 시장을 키웠다는 것이다. 제재를 받은 원유를 거래하려는 국가들이 달러 결제 인프라를 우회하면서, 위안화 결제 네트워크가 대안 인프라로서의 실전 검증을 축적해왔다.
미 국채 대규모 매도 — 시장의 경고
페트로달러 체제에 대한 불신은 이미 채권 시장에서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각국 중앙은행을 대신해 보관 중인 미 국채 규모가 이란 전쟁 개전 이후 단 한 달 만에 820억 달러 감소해 2조 7,000억 달러까지 떨어졌다. 이는 2012년 이래 최저치다.
공식적인 매도 이유는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자국 통화 방어다. 호르무즈 봉쇄로 국제 유가가 급등하면서,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달러 유출이 심화됐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보유 국채를 매각해 달러를 확보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시장 일각에서는 다른 해석이 흘러나온다. 이 매도 규모와 속도가 단순한 유동성 확보 차원을 넘어, 달러 장기 약세에 대비한 선제적 포트폴리오 재조정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시각이다. 달러 패권이 구조적으로 약화된다면, 달러 표시 자산인 미 국채의 매력도 함께 하락한다. 각국 중앙은행이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 해석의 핵심이다.
두 가지 균열, 하나의 결과
도이체방크는 현재의 위기가 페트로달러 체제에 가하는 충격을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직접적 균열이다. 호르무즈를 통과하는 유조선이 위안화로 통행료를 납부하면, 그 원유 거래에서 달러는 배제된다. 거래 규모가 축적될수록 달러 수요 기반은 직접적으로 잠식된다.
두 번째는 신뢰의 균열이다. 페트로달러 체제의 본질은 미국의 군사력이 걸프 안보를 보장한다는 신뢰다. 미국이 호르무즈 해협을 안정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거나, 더 나아가 통제력을 회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1974년 협약의 전제 자체가 흔들린다.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이 미국의 안보 보장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페트로달러 체제의 지속 가능성은 협상 테이블 위에 올라오게 된다.
달러 패권 붕괴론은 과거에도 반복적으로 제기됐다가 과장된 것으로 판명된 바 있다. 달러의 네트워크 효과와 미국 금융시장의 깊이는 단기간에 대체될 수 없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과거의 위기와 성격이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호르무즈 봉쇄, 위안화 통행료, 사우디의 mBridge 참여, 각국 중앙은행의 국채 매도가 동시다발적으로 맞물리며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이체방크는 "이번 분쟁이 걸프 인프라에 대한 미국의 안보 우산과 글로벌 원유 해상 교역의 안전에 추가적인 단층선을 노출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페트로위안이 페트로달러를 대체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더 이상 먼 미래의 가설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호르무즈 해협에서 실시간으로 검증되고 있는 현실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