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결제은행(BIS)이 2026년 연차경제보고서(Annual Economic Report) 제3장을 통해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가장 정교하고 비판적인 진단을 내놨다.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하다. "화폐에 대한 신뢰를 고정하기: 스테이블코인을 넘어선 혁신(Anchoring trust in money: innovation beyond stablecoins)". '스테이블코인을 넘어선다'는 부제는, 이번 보고서가 디지털 화폐 혁신의 무게중심을 스테이블코인이 아닌 다른 곳에 두고 있음을 암시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BIS의 메시지는 두 갈래다. 첫째, 현행 스테이블코인은 기술적으로 토큰화의 잠재력을 일부 보여주지만 화폐가 갖춰야 할 근본 속성에는 미달하며, 광범위하게 채택될 경우 새로운 거시·금융 리스크를 만든다. 둘째, 진짜 기회는 토큰화의 기술적 진보를 '중앙은행 화폐를 정점으로 한 2단계(two-tier) 통화 구조'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 혁신을 거부하는 보고서가 아니라, "낡은 것을 개선하고 새로운 것을 가능하게 하되 화폐에 대한 신뢰의 토대는 지킨다"는 원칙을 제시하는 보고서다.
화폐의 신뢰는 어디서 오는가
BIS는 본론에 앞서 '효과적인 통화 체계가 갖춰야 할 속성'을 다시 정의한다. 새로운 디지털 화폐 형태를 평가할 기준선을 먼저 세우려는 것이다.
보고서가 꼽는 화폐의 두 가지 근본 속성은 ▲가격·계약·대차대조표를 동일한 공통 계산단위(unit of account)로 표현하기로 한 사회적 합의와 ▲그 단위로 표시된 모든 청구권이 중앙은행 화폐와 액면가(par)로, 최종성을 갖고 교환되는 화폐의 단일성(singleness of money)이다. 1달러는 누가 발행했든, 위기 상황에서든 언제나 1달러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두 속성이 결합될 때 화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no questions asked)" 받아들여지는, 정보에 둔감한(information-insensitive) 자산이 된다.
이 속성들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적 성취다. 중앙은행의 물가 안정 의지, 견고한 법체계, 감독받는 금융중개기관, 그리고 시스템 차원의 탄력적 유동성 공급(elasticity)이 이를 떠받친다. 분기말이나 납세일처럼 지급 수요가 급변할 때 중앙은행이 일중 신용과 최종대부자 기능으로 결제 잔액을 공급하기에, 상업은행 예금은 중앙은행 부채와 액면가로 교환될 수 있다. 여기에 결제 수단·플랫폼 간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이 화폐의 '연결 조직' 역할을 하고, 자금세탁·테러자금조달 방지(AML/CFT)를 포함한 금융 무결성(integrity)이 신뢰를 완성한다.
BIS가 이 기준선을 길게 설명한 이유는 분명하다. 뒤이어 다룰 스테이블코인을 바로 이 잣대로 측정하기 위해서다.
스테이블코인 진단: ETF에 가깝지 공적 화폐가 아니다
보고서는 스테이블코인을 "공개·비허가형(public permissionless) 블록체인 위에서 민간이 발행하는, 화폐 유사 기능을 제공하는 토큰"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냉정한 수치를 제시한다.
- 법정화폐 연동 스테이블코인의 99.4%가 미국 달러에 페그돼 있다. 사실상 달러라는 기축통화의 계산단위에 무임승차하는 구조다.
- 2026년 5월 말 기준 시가총액은 약 3,200억 달러. 2025년 말~2026년 초 가상자산 시장 급락 속에서도 비교적 견조했으나, 수조 달러 규모의 은행 예금에 비하면 여전히 미미하다.
- 2025년 연간 거래액은 추정 28조 달러에 달하지만, 이는 미국 최대 도매결제망의 3영업주(週) 정산액에도 못 미친다. 동일 주체 간 지갑 이체를 제외한 순거래액은 훨씬 작다. Visa 데이터 기준 조정 거래액은 연 3,900억 달러 수준으로, 전체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 용처는 여전히 가상자산 거래(트레이딩)에 집중돼 있고, 신흥·개도국(EMDE)에서 역외 가치저장 수단으로 일부 쓰일 뿐이다.
BIS의 핵심 비판은 화폐성(moneyness)에 있다. 스테이블코인 이체는 중앙은행 대차대조표에서 직간접적으로 결제되지 않으며, 발행자·블록체인 간 액면가 교환을 모든 상황에서 보장하지 못한다. 2차 시장 가격은 액면에서 (대체로 소폭이지만) 이탈하고, 상환 마찰이 흔하다. 보고서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현행 스테이블코인은 "지급 수단보다 상장지수펀드(ETF) 지분에 가깝다."
여기에 금융 무결성 문제가 겹친다. 가명성과 비수탁(unhosted) 지갑은 KYC·AML/CFT 준수를 약화시키고, 믹서와 크로스체인 브리지는 자금 흐름을 가린다. 발행사들이 특정 주소 잔액을 동결하는 등 기술적 통제가 작동하기도 하지만, 일상 결제의 대규모·상시 AML 통제를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이 BIS의 판단이다.
마지막으로 파편화(fragmentation)다. 같은 이름의 코인이라도 이더리움 위의 USDT와 솔라나 위의 USDT는 서로 다른 원장에 존재해 자연스럽게 통신하지 않는다. 브리지로 연결하지만 보안·비용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화폐의 단일성을 떠받치는 '동일 가치 수용'이 구조적으로 위협받는 셈이다.
만약 스테이블코인이 커진다면 — 세 가지 준비자산 시나리오
업계 일부는 2030년까지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2조~4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BIS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이블코인이 금융시스템의 핵심으로 부상한다면 어떤 거시·금융 효과가 나타날지를, 준비자산 구성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눠 분석했다. 가계가 예금 100달러로 스테이블코인을 사는 단순 사례를 가정한다.
- 은행 예금 시나리오 — 소매 예금이 발행사의 도매 예금으로 대체된다. 은행 자산 총량은 그대로지만, 도매 예금의 높은 유출률 탓에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순안정자금조달비율(NSFR)이 악화된다.
- 국채(단기 T-bill) 시나리오 — 발행사가 단기 국채를 대량 보유하면, 대규모 환매 시 국채 금리 곡선에 비대칭적 충격을 줄 수 있다. 런(run) 상황에서 준비자산 급매(fire sale)가 단기자금시장으로 스트레스를 전이시킨다.
- 중앙은행 지급준비금 시나리오 — 이용자가 스테이블코인을 중앙은행 화폐의 근접 대체재로 인식해, 위기 시 은행과 발행사 간 유동성이 급격히 이동할 위험이 커진다.
미국 데이터로 보정한 정량 모형의 결론은 '제한적이지만 부정적'이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의 국채 수요가 정부 조달비용을 낮추는 재정 여력(fiscal space) 채널은 산출을 끌어올리지만, 은행 자금조달 비용 상승으로 인한 은행 대출 채널의 위축이 이를 상쇄하고 넘어선다. 그 결과 시총 1조·2조·3조 달러 시나리오 모두에서 중기 순산출 효과는 소폭 마이너스다. 다만 정부 부채비율이 높거나(122%→175%) 해외 수요가 큰 경우엔 방향이 바뀔 수 있다.
토큰포스트 관점: 한국과 원화에 던지는 질문
BIS 보고서에서 한국 독자가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은 '스테이블코인 달러라이제이션(stablecoin dollarisation)'과 2단계 시스템으로의 통합 두 가지다.
첫째, 보고서는 외화 스테이블코인(특히 달러 연동)이 신흥·개도국의 전통적 예금 달러라이제이션을 재현하거나 가속할 수 있다고 본다. 자본 통제를 우회하고 외환 규제를 무력화하며, 한 번 정착하면 좀처럼 되돌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은 고인플레이션 EMDE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 분석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통화주권 논쟁에 그대로 적용된다. "왜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BIS의 답은 명확하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결제·가치저장 영역으로 확산될수록 자국 통화의 계산단위 역할이 잠식되고 통화정책 자율성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보고서는 "건전한 거시정책과 효율적 국내 결제 시스템 정비가 오히려 통화주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덧붙인다. 디지털자산기본법과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 설계를 앞둔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둘째, BIS가 제시하는 진짜 청사진은 스테이블코인이 아니라 '통합 원장(unified ledger)'이다. 토큰화된 중앙은행 지급준비금, 토큰화된 상업은행 예금, 적절히 설계·감독된 민간 화폐, 그리고 토큰화 자산을 하나의(혹은 상호운용 가능한 복수의) 플랫폼에 올려, 메시징·대사(reconciliation)·자산 이전을 통합하고 원자적 결제(atomic settlement)를 구현한다는 구상이다. 여기서 중앙은행 화폐는 단일성의 기반이자 신뢰의 닻으로 남는다.
이 구상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다. BIS는 8개 중앙은행과 40여 개 규제 금융기관이 참여하는 프로젝트 아고라(Project Agorá)를 실증 사례로 든다. 토큰화된 상업은행 예금을 위한 공통 원장과 관할권별 토큰화 지급준비금 원장을 분리해, 검증과 잔액 잠금 이후 통화 간 '전부 아니면 전무(all-or-nothing)' 방식의 원자적 결제가 가능함을 보였다. 한국은행은 이 프로젝트 아고라의 참여 중앙은행 중 하나다. 즉 BIS가 그리는 '차세대 통화시스템'의 실험에 한국이 이미 한 축으로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토큰화 논의를 스테이블코인 발행 여부로만 좁혀 보는 시각이 얼마나 협소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규제는 수렴하고 있다
BIS는 EU(MiCA), 홍콩, 일본, 싱가포르, 영국, 미국(GENIUS Act) 6개 관할권의 스테이블코인 규제를 비교하며 공통 기둥을 추렸다. ▲액면가 상환 의무 ▲완전 준비자산 적립 ▲보유자에 대한 이자 지급 금지가 그것이다. 차이는 상환 기한·수수료, 준비자산 구성, 중앙은행 계좌 접근, 자본 요건의 강도에서 갈린다. 미국 GENIUS Act는 1대1 준비자산과 파산 시 보유자 우선권을, 영국은 시스템적 파운드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준비자산의 40% 이상을 무이자 영란은행 예치로 요구하는 안을 검토 중이다.
규제 프레임워크가 갖춰진다고 비(非)달러 규제준수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저절로 커지진 않았다는 점도 BIS는 짚는다. 견고한 국내 규제만으로는 대규모 비달러 시장이 촉발되지 않았고, 비달러 발행은 달러 페그 대비 극히 일부에 그친다. 규제 정비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의미다.
결론: 혁신을 거부하지 않되, 신뢰를 흥정하지 않는다
BIS의 메시지는 반(反)혁신이 아니다. 보고서는 토큰화·DLT가 결제·정산·금융인프라를 개선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기술만으로는 상호운용성, 유동성, 무결성, 그리고 중앙은행이 뒷받침하는 신뢰라는 제도적 토대를 대체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화폐는 기술 그 이상이며, 제도적 성취다. 화폐의 속성은 우연한 편의가 아니라 근본적 경제 마찰에 대한 어렵게 얻은 해법이다." 보고서를 관통하는 이 한 문장은, 스테이블코인을 미래 화폐의 종착점으로 보는 시각에 대한 BIS의 정중하지만 단호한 반론이다. 토큰화의 미래는 액면을 흔드는 민간 베어러 토큰이 아니라, 신뢰받는 대차대조표 위에 실행 가능한 화폐와 자산을 올리는 데 있다는 것 — 스테이블코인, 토큰화, 그리고 금융시장의 미래를 좇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보고서다.
편집자 주: 본 기사는 BIS 2026 연차경제보고서 제3장 원문을 토대로 작성됐다.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약 3,200억 달러, 2026년 5월 말), 거래액, 준비자산 시나리오 등 수치는 모두 보고서 기준이다. 한국은행의 프로젝트 아고라 참여는 2024년 공개된 사실이나, 참여 기관 구성은 변동될 수 있으므로 최신 발표 확인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