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디지털 유로의 개인정보 보호 장치를 다시 전면에 내세웠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둘러싼 감시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유럽은 사생활 보호와 지급 주권을 함께 내세워 입법 절차를 밟고 있다.
피에로 치폴로네(Piero Cipollone) ECB 집행이사는 8월 10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디지털 유로 설계가 유로시스템이 볼 수 있는 거래 정보를 제한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유로시스템은 지급인이나 수취인을 식별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치폴로네 집행이사의 설명은 디지털 유로가 익명 현금과 같다는 뜻이 아니다. 거래를 처리하는 은행 등 결제기관은 자금세탁방지 목적상 이용자를 확인하지만, ECB가 특정 개인과 결제 기록을 직접 연결하지 않는 구조라는 취지다.
ECB는 디지털 유로를 현금의 전자적 보완물로 규정한다. 유로존 이용자는 은행이나 공공 중개기관에 만든 계정에 디지털 유로를 보관하고, 매장·온라인·개인 간 송금에 쓸 수 있다.
오프라인 결제도 설계 범위에 들어 있다. ECB는 공식 안내문에서 유로존 전역을 포괄하는 유럽 자체 디지털 결제 수단이 없고, 20개국 중 13개국이 카드 결제에서 국제 카드망에 의존한다고 밝혔다.
논점은 기술보다 신뢰에 가깝다. 디지털 유로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공적 화폐라는 점에서 민간 스테이블코인이나 가상자산과 다르지만, 모든 전자결제는 데이터 흔적을 남긴다.
이 때문에 ECB는 중앙은행이 고객 개인정보를 직접 갖지 않는 구조를 강조하고 있다. 오프라인 결제에서는 결제 세부 정보가 지급인과 수취인 쪽에만 남는다는 설명도 붙였다.
유럽의회 경제통화위원회는 6월 23일 디지털 유로 관련 입장을 찬성 43표, 반대 14표, 기권 1표로 채택했다. 유럽의회는 개인정보 보호를 기본 설계에 넣고, 영지식증명 같은 기술로 개인정보를 노출하지 않고 거래를 검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영지식증명은 특정 정보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도 조건 충족 여부를 확인하는 암호 기술이다. 디지털 결제에서는 이용자 신원을 모두 드러내지 않으면서 거래의 유효성을 검증하는 방식으로 거론된다.
유럽의회 입장문에는 ECB가 개인 식별 데이터에 접근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담겼다. 이는 디지털 유로 논의가 단순한 결제 수단 도입을 넘어 개인정보 보호 장치의 법제화 문제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은 다른 길을 택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은 2025년 1월 23일 행정명령에서 연방 기관이 미국 안팎에서 CBDC를 수립·발행·촉진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같은 행정명령은 진행 중인 CBDC 관련 계획도 종료하도록 했다. 미국 정부는 같은 문서에서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성장을 촉진하겠다는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유럽의 쟁점은 발행 여부만이 아니다. 누가 결제 데이터를 볼 수 있는지, 어느 범위까지 반(反)자금세탁 규정을 적용할지, 민간 결제 사업자와 중앙은행 결제 수단이 어떻게 공존할지가 함께 걸려 있다.
디지털 유로 논의는 유럽 금융 인프라의 자립 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본지는 앞서 디지털 유로 추진 일정도 차기 ECB 총재가 다뤄야 할 주요 과제라고 보도했다.
ECB는 2026년 중 필요한 유럽연합 법안이 채택된다는 전제 아래 2029년 중 첫 발행 준비를 목표로 제시했다. 최종 발행 여부는 입법 절차와 후속 시험을 거쳐 결정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