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 AI 투자 열기가 이어지고 있지만 자금은 시장 전반에 고르게 퍼지지 않고 있다. 특히 원고 측 업무를 겨냥한 스타트업에 투자가 집중되면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아온 ‘기업 방어’ 분야가 새로운 성장 구간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크런치베이스 뉴스가 최근 공개된 투자 유치 내역을 바탕으로 집계한 결과를 보면, 원고 측 법률 AI 기업에 대한 쏠림은 뚜렷하다. 이븐업(EvenUp)은 3억7000만달러, 한화 약 5621억원을 유치했고, 이브(Eve)는 1억6400만달러, 약 2491억원을 끌어모았다. 수피오(Supio)는 8500만달러, 약 1291억원, 대로우(Darrow)는 6300만달러, 약 957억원을 각각 조달했다. 이들 4개사의 누적 투자금은 약 6억8200만달러, 한화 약 1조360억원 수준이다.
공개 기준으로 보면 원고 측 중심 기업들이 법률 AI 투자금의 약 71%를 차지했다. 투자자들이 이미 ‘도입이 쉽고’, 업무 흐름이 비교적 표준화돼 있으며, 벤처 투자 논리로 설명하기 쉬운 영역을 선별해 자금을 집행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 같은 쏠림은 원고 측 로펌의 구조와도 맞닿아 있다. 고객 접수, 사건 평가, 의료 기록 검토, 합의 요구서 작성 같은 업무가 반복적이고 정형화돼 있어 AI 자동화 효과를 입증하기 쉽다. 소프트웨어를 도입했을 때 처리 속도와 생산성 개선도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난다. 투자자 입장에선 제품 설명도 쉽고, 판매 경로도 분명한 시장인 셈이다.
파편화된 기업 방어 시장
반면 방어 측 법률 시장은 여전히 파편화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기업 법무팀과 대형 방어 사건을 맡는 로펌들은 스프레드시트, 이메일, 개별 외부 로펌 보고 체계에 크게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수백 건, 많게는 수천 건의 소송을 동시에 관리하는 기업도 전체 포트폴리오 기준의 위험도, 합의 패턴, 법률 비용, 외부 대리인 성과를 한눈에 파악하지 못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유통, 보험, 헬스케어, 금융 서비스 기업처럼 소송 물량이 많은 업종일수록 이런 비효율은 더 크게 드러난다. 문제는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이를 벤처 투자 가능한 소프트웨어 카테고리로 만들 수 있는지는 그동안 불확실했다.
기업 방어 시장이 늦게 발전한 데는 구조적 이유도 있다. 업종별 규제 환경이 다르고, 사건 유형과 업무 흐름도 제각각이라 원고 측보다 표준화가 어렵다. 의사결정 과정 역시 기업 법무총괄, 리걸옵스 팀, 외부 로펌 관계까지 얽혀 있어 영업 주기가 길어지는 편이다. 투자자에게 즉각적으로 매력적인 시장으로 보이기 어려웠던 배경이다.
변화하는 투자 흐름
다만 흐름은 바뀌고 있다. 크런치베이스 뉴스는 지난해 가을, 2025년 법률 테크 투자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전한 바 있다. AI 기반 법률 업무 자동화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커지는 가운데, 원고 측 로펌이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사건 발굴과 가치 평가, 소송 수행 속도를 높일수록 방어 측의 운영 부담도 함께 커지고 있다.
여기에 AI 기술 발전은 복잡한 소송 업무를 체계화할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 유사 사건 비교, 조기 위험 탐지, 포트폴리오별 결과 벤치마킹이 가능해지면서, 방어 측 법률 AI는 더 이상 틈새 시장이 아니라 아직 충분히 개발되지 않은 대형 소프트웨어 영역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투자자들이 주목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대규모 기업 시장이 분명한 문제를 안고 있고, 기술 구현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1등 사업자가 없다는 점이다. 특히 스타트업이 ‘독점적 결과 데이터’와 반복 가능한 기업 도입 모델을 함께 확보할 수 있는지가 향후 승부처로 꼽힌다.
승부처는 데이터
방어 측에서 떠오르는 접근법 중 하나는 ‘노출 위험’과 합의금 벤치마킹이다. 과거 사건 해결 데이터를 활용해 비슷한 소송의 합의 범위, 법률 비용, 사건 위험도를 예측하는 방식이다. 관할권, 원고 측 로펌, 청구 유형 같은 변수를 비교해 기업 법무팀이 더 빠르고 일관된 판단을 내리도록 돕는 구조다.
이 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질 경우 가장 강력한 경쟁력은 데이터에서 나올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방어 측 합의 세부 내용과 사건별 경제성, 해결 패턴은 공개 기록만으로는 복원하기 어렵다. 여러 고객사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표준화한 플랫폼이 등장하면, 규모가 커질수록 더 강한 데이터 자산을 갖게 되는 ‘수직형 소프트웨어’의 전형적 해자가 형성될 수 있다.
아직까지 기업 방어 소송 인텔리전스에 특화해 대규모 성과를 낸 법률 AI 선두 주자는 뚜렷하지 않다. 그만큼 이 시장은 이미 자금이 몰린 원고 측 업무보다, 이제 막 소프트웨어 틀이 갖춰지기 시작한 대형 기업 법무 영역에서 다음 승자가 나올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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