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다시 흔들리자 미국과 영국, 유로존의 중앙은행들이 기준금리를 일제히 동결했다. 물가 상승 압력은 커졌지만 경기 둔화 우려도 함께 높아져, 각국 통화당국이 당장 금리를 움직이기보다 상황을 더 지켜보는 쪽을 택한 것이다.
유럽중앙은행은 30일(현지시간) 통화정책회의에서 예금금리 연 2.00%, 기준금리 2.15%, 한계대출금리 2.40%를 모두 유지했다. 유럽중앙은행은 최근 들어온 경제 지표가 기존 물가 전망과 대체로 맞아떨어졌다고 보면서도, 물가는 더 오를 가능성이 커졌고 성장세는 더 약해질 위험이 커졌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유로존의 2026년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 잠정치는 3.0%로, 3월 2.6%보다 높아졌다. 반면 1분기 경제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0.1%에 그쳐, 물가는 높은데 경기는 힘을 잃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를 자극했다.
다만 유럽중앙은행은 현재의 물가 상승을 아직은 에너지 충격의 직접 영향으로 보는 분위기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는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단기 물가가 2% 목표를 크게 웃돌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장기 인플레이션 기대는 대체로 2% 부근에 머물고 있어 중기적으로는 물가가 다시 안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전쟁의 경제적 파급력은 결국 유가와 가스값 같은 에너지 가격 충격이 얼마나 오래 가는지, 또 그 영향이 임금과 서비스 가격 등 다른 부문으로 얼마나 번지는지에 달렸다는 뜻이다. 라가르드 총재는 1970년대식 장기 스태그플레이션과 지금 상황은 구조적으로 다르다며 과도한 해석에는 선을 그었다.
시장에서는 유럽중앙은행이 오는 6월부터 다시 금리 인상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번 회의 뒤 기대 강도는 다소 낮아졌다. 유럽중앙은행은 2024년 6월부터 1년 동안 예금금리를 2.00%포인트 내린 뒤 지난해 7월 이후 이번까지 일곱 차례 연속 동결했다. 현재 유로존 예금금리와 한국 기준금리 2.50%의 격차는 0.50%포인트다. 유로존과 미국의 금리 차이는 1.50~1.75%포인트로 유지되고 있다. 베렌베르크은행의 펠릭스 슈미트는 이날 지표만으로는 금리 인상을 정당화하기에 부족하다며, 향후 몇 달 동안 에너지발 물가 충격이 다른 품목으로 번지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봤다.
영국과 미국도 같은 고민 속에 금리를 묶어뒀다. 잉글랜드은행은 이날 기준금리를 연 3.75%로 유지했고,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29일 기준금리 3.50~3.75%를 동결했다. 영국의 최근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3%로 목표치 2%를 크게 웃돌았고, 미국도 에너지 가격 상승이 높은 물가의 한 원인이라고 밝혔다. 세 중앙은행 모두 중동 정세가 에너지 시장을 자극하고, 그 여파가 물가와 성장 전망을 동시에 흔들고 있다는 점을 공통으로 지적했다. 이 같은 흐름은 당분간 주요국 통화정책이 물가 억제와 경기 방어 사이에서 더욱 신중한 줄타기를 이어갈 가능성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