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속도를 내고 있다. 정치권과 금융당국, 업계 모두가 ‘디지털 원화’ 구상에 공감대를 형성한 가운데, 블록체인을 활용한 차세대 통화 인프라 구축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그런데 이 흐름은 낯설지 않다. 본지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한국형 스테이블코인, 수요 없는 혁신인가.”
그 지적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그 연장선에서 우리는 이제 스테이블코인을 단순한 결제 혁신이 아닌 통화 전략의 도구로 재정의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본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금융 인프라를 갖춘 나라다. 실시간 송금은 기본이고, 네이버페이·카카오페이와 같은 간편결제는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인플레이션 우려도 비교적 낮고, 원화의 안정성 역시 견고하다. 이러한 환경에서 “스테이블코인을 왜 써야 하느냐”는 의문은 타당하다. 실제로 본지도 “국내 실물경제에서 스테이블코인 사용 수요는 제한적”이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그 질문이 국내 소비자 결제 환경에만 국한된다면, 이는 지나치게 협소한 관점이다. 지금 논의의 핵심은 ‘결제’가 아니라 ‘통화’여야 한다.
한국은 외환시장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통화 주권 영역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 원화는 세계 5위권의 거래량을 자랑하지만, 그 가격은 역외 시장—런던, 홍콩, 싱가포르—에서 결정된다. 역외 NDF(Non-Deliverable Forward) 시장이 원화의 주된 거래장이 되었지만, 국내 금융기관은 법적·제도적 제약으로 이 시장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서울이 아닌 해외에서 원화의 가치가 결정되는, ‘주권 없는 외환시장’이라는 기형적 현실에 놓여 있는 것이다.
외환시장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단기간에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현실도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디지털 통화 전략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바로 그 기술적 우회로다.
블록체인 기반 원화 토큰은 24시간 실시간 글로벌 시장에 노출된다. 이는 기존 외환제도 안에서는 불가능했던 자국 통화의 글로벌 유통 채널 확보를 가능케 한다. 단순히 국내 결제를 디지털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글로벌 디지털 자산 생태계 속에서 원화를 실시간으로 재등장시키는 통화 전략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미국은 ‘GENIUS Act’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디지털 달러’로 제도화하려 하고 있다. 일본, 싱가포르, 홍콩 역시 디지털 자산을 외환정책 도구로 활용하려는 전략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들 국가는 ‘결제를 편하게 하자’는 차원이 아니라, ‘자국 통화를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진정성 있게 추진하려면, 결제 수단으로서의 편의성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통화 주권 회복을 위한 기술 실험장으로 삼는 전략적 사고의 결과물이어야 한다. 특히 Web3 기반 게임, 거래소, 글로벌 커뮤니티 경제권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참여와 보상의 기준 단위로 작동하며, 기존 통화가 수행하지 못하는 실질적 경제 운영의 매개체가 되고 있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규제 정비가 아니라 전략 설계다. 수요 없는 혁신은 실패한다. 그러나 전략 없는 기술은 더 빨리 무너진다. 스테이블코인을 단지 결제 수단이 아닌 디지털 통화 전략의 첫걸음으로 정의할 때, 비로소 원화의 미래도 그 위에서 설계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