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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스테이블코인은 시작일 뿐이었다”…한국 디지털자산 전략이 ‘산업 설계’ 단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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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블코인 논의를 넘어 RWA·STO·AI 에이전트 경제까지…한국 디지털자산 정책, 규제에서 산업 인프라 설계로 전환

 밀러 화이트하우스-레빈 솔라나 정책연구소 대표가 증권의 발행·유통을 퍼블릭 블록체인 기반으로 구현하는 미국의 규제 방향과 ‘Project Open’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오승환/토큰포스트)

밀러 화이트하우스-레빈 솔라나 정책연구소 대표가 증권의 발행·유통을 퍼블릭 블록체인 기반으로 구현하는 미국의 규제 방향과 ‘Project Open’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오승환/토큰포스트)

23일 오후 서울 역삼동 해시드 라운지. ‘대한민국 Digital G2를 향한 정책 심포지엄: 디지털자산과 자본시장의 미래–미국과 한국의 선택’이 열린 현장은 행사 시작 전부터 묵직한 긴장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국내 주요 언론사 기자와 가상자산거래소 관계자, 블록체인 빌더, 법률 전문가, 정책 실무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의 관심은 단순한 가상자산 가격이나 거래소 상장 이슈에 머물지 않았다. 스테이블코인, 실물자산 토큰화(RWA), 토큰증권(STO), 인공지능(AI) 에이전트, 디지털자산기본법. 무대 위에 오른 키워드들은 모두 미래 금융 인프라를 향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스테이블코인 규제와 디지털자산기본법을 논의하는 정책 심포지엄이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발표를 직접 듣고 확인한 본질은 조금 달랐다.

논의의 중심에는 스테이블코인이라는 하나의 결제수단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블록체인과 AI를 중심으로 다시 설계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미래 금융 지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디지털자산 정책의 중심은 ‘통제’와 ‘방어’였다. 테라·루나 사태와 FTX 붕괴 이후 국회와 금융당국의 관심은 투자자 보호, 거래소 감독, 상장 심사와 불공정거래 차단에 집중됐다. 그 과정은 필요했고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날 현장에서 확인한 분위기는 분명히 달랐다.

투자자 보호는 더 이상 산업을 막기 위한 논거가 아니라 새로운 시장을 설계하기 위한 기본 전제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질문도 달라졌다.

스테이블코인을 누가 발행할 것인가. 준비자산은 어떻게 보관하고 상환을 보장할 것인가. 원화 기반 디지털 결제 인프라는 은행 중심으로 설계할 것인가, 핀테크와 기술기업에도 실질적인 역할을 부여할 것인가. RWA와 STO는 기존 자본시장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AI 에이전트가 경제활동의 주체가 되는 시대에 결제와 정산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 것인가.

이는 한국 디지털자산 정책이 수세적 규제를 지나 공세적 산업 설계 단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스테이블코인을 ‘통화 인프라’로 본 안도걸 의원

기조연설에 나선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스테이블코인을 단순한 투자상품이나 새로운 지급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스테이블코인을 “미래 금융과 실물경제를 구동하는 엔진”으로 규정했다.

국제송금과 외국인 근로자 송금, K-콘텐츠 결제, 관광 소비, 기업 간 정산 등 다양한 실물경제 영역에서 스테이블코인의 활용 가능성이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도 제시했다.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스테이블코인과 실물자산 토큰화(RWA)를 거쳐 디지털자산이 미래 금융 인프라로 발전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오승환/토큰포스트)

현재 국제송금은 여러 중개기관과 국가별 금융망을 거치면서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발생한다. 반면 블록체인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원칙적으로 24시간 이체와 정산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송금 속도가 빨라지는 데 있지 않다. 결제와 청산, 환전과 소유권 이전이 하나의 디지털 네트워크 안에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안 의원의 발표는 스테이블코인을 기존 금융망 위에 추가되는 하나의 결제 서비스가 아니라, 결제와 정산 구조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금융 레일로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AI 에이전트 경제에 대한 언급이었다.

앞으로 AI 에이전트는 인간의 직접 개입 없이 정보를 수집하고 상품과 서비스를 비교하며, 계약을 체결하고 결제까지 수행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AI는 은행 영업시간이나 국가별 결제망에 맞춰 움직이지 않는다. 초 단위로 거래하고 국경을 넘어 서비스를 구매하며 결과를 즉시 정산해야 한다.

전통 금융망이 본인확인과 영업시간, 중개기관을 중심으로 설계됐다면 AI 에이전트 경제는 기계와 기계가 거래하고 소액 결제가 실시간으로 반복되는 구조다. 이 환경에서는 프로그래밍이 가능하고 24시간 작동하는 디지털 화폐가 필요하다.

스테이블코인이 AI 시대의 ‘기계 간 결제수단’이자 디지털 경제의 결제·정산 인프라로 주목받는 이유다.

이는 국회 차원의 디지털자산 인식이 가상자산 투자자 보호를 넘어 산업과 통화 인프라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스테이블코인을 ‘코인’이 아니라 AI 시대의 경제 운영체계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안 의원은 민주당 디지털자산 태스크포스(TF)가 현재 발의된 관련 법안을 통합하는 작업을 사실상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디지털자산기본법의 하반기 국회 통과를 위해 총력을 다하겠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여야 합의를 우선하되 원 구성 지연 등으로 입법 일정이 막힐 경우 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바탕으로 단독 원 구성까지 고려할 수 있다는 발언은 현장에서도 주목받았다. 디지털자산기본법을 단순한 검토 과제가 아니라 이번 국회에서 처리해야 할 핵심 산업 입법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로 읽혔다.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소수의 투자상품에서 미래 금융 인프라로’를 주제로 스테이블코인과 RWA 중심의 디지털 금융 전환 방향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오승환/토큰포스트)

핵심은 자본금이 아니라 준비자산과 상환 구조다

스테이블코인 발행 구조와 관련해서도 구체적인 방향이 제시됐다.

발행인의 최소 자본금을 50억 원 수준으로 설정하고, 발행 규모에 상응하는 준비자산을 보유하도록 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배구조 측면에서는 은행의 신뢰성과 핀테크의 혁신성을 결합하는 절충 모델이 언급됐다.

은행이 준비자산 관리와 금융 안전망을 담당하되 핀테크 기업이 기술 개발과 서비스 혁신을 주도할 수 있도록 일정 수준의 지분과 경영 참여를 보장하는 방식이다. 특히 핀테크 기업에 34% 수준의 지분을 보장해 주주총회 특별결의에 대한 견제권을 갖도록 하는 방안은 제도 논의가 구체적인 설계 단계로 들어섰음을 보여줬다.

다만 스테이블코인의 안정성을 결정하는 것은 발행인의 자본금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준비자산의 질과 보관 방식, 이용자의 상환청구권이다.

준비자산을 현금과 예금, 단기국채 가운데 무엇으로 구성할 것인지, 발행인의 고유재산과 어떻게 분리할 것인지, 운용수익은 누구에게 귀속할 것인지, 발행인이 파산했을 때 이용자 권리는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가 함께 정해져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의 신뢰는 블록체인 기술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용자가 언제든 액면가로 상환할 수 있다는 확신, 준비자산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검증, 발행인이 이를 임의로 유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 장치가 결합돼야 한다.

결국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의 핵심은 ‘누가 발행할 것인가’보다 ‘누가 어떤 책임을 지고 상환을 보장할 것인가’에 있다.

통화주권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국내 디지털 결제와 가상자산 거래, 콘텐츠 소비 영역에서 빠르게 확산될 경우 한국의 디지털 경제는 사실상 달러 기반 결제망에 편입될 수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국내 기업에 새로운 사업 기회를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 디지털 경제에서 원화의 사용 영역을 방어하고 확장하는 전략적 수단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해시드가 던진 질문, “한국은 선택받는 플랫폼이 될 수 있는가”

김에스더 해시드오픈리서치 연구원의 발표는 스테이블코인 논의를 국가 전략의 문제로 확장했다.

김 연구원은 싱가포르와 아랍에미리트(UAE) 사례를 들며 디지털 시대의 국가 경쟁력은 더 이상 영토와 인구, 전통 산업의 규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김에스더 해시드오픈리서치(Hashed Open Research) 연구원이 디지털자산의 제도화와 시장 구조 변화, 한국의 미래 금융 경쟁력에 관해 발표하고 있다. (사진=오승환/토큰포스트)

자본과 인재, 기업과 기술은 국경을 넘어 빠르게 이동한다. 결국 국가는 모든 가치를 직접 소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글로벌 자본과 인재로부터 선택받는 플랫폼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와 UAE는 자국 시장의 크기만으로 경쟁하지 않는다. 명확한 규칙과 세제, 라이선스와 인재 유입 정책,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를 결합해 기업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국가가 하나의 플랫폼이라면 법과 규제는 그 플랫폼의 운영체계다. 예측 가능한 라이선스와 신속한 행정, 기술 중립적인 규칙을 제공하는 국가는 기업과 인재를 끌어들인다. 반대로 규정의 해석이 불명확하고 사업 허가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국가는 기술과 자본을 다른 시장으로 밀어낼 수 있다.

한국은 이미 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반도체와 제조업, 자동차와 조선, K-콘텐츠와 게임 산업, 높은 인터넷 보급률과 디지털 리터러시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조합이다.

김 연구원은 한국이 AI 에이전트, 피지컬 AI, 로보틱스, K-컬처와 디지털자산을 하나의 선순환 구조로 연결한다면 ‘Digital G2’라는 새로운 국가 성장 전략도 가능하다고 봤다.

[해시드오픈리서치가 제시한 한국의 ‘디지털 G2’ 선순환 구상. 제조업과 AI·로봇, K-컬처, 디지털자산을 연결해 새로운 국가 성장 동력을 구축하는 전략을 담고 있다.(사진=오승환/토큰포스트)]

중요한 것은 디지털자산을 별도의 산업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디지털자산은 제조와 AI, 콘텐츠와 게임, 금융을 연결하는 유동성 인프라로 제시됐다. 로봇이 서비스를 제공하고 AI 에이전트가 거래를 중개하며 콘텐츠와 지식재산권이 토큰화되고, 그 대가가 스테이블코인으로 정산되는 구조다.

스테이블코인과 RWA, STO는 각각 고립된 금융상품이 아니다. 한국 산업 전체를 하나의 디지털 경제권으로 연결하는 장치다.

K-콘텐츠 역시 이 구조 안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음악과 영화, 드라마와 웹툰, 사진과 게임 아이템, 캐릭터 지식재산권은 전 세계에서 소비되지만 권리 관리와 수익 배분은 여전히 복잡하다.

콘텐츠 권리를 디지털화하고 글로벌 투자자와 소비자가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면 토큰화는 단순한 자금 조달을 넘어 창작자와 투자자, 플랫폼 사이의 가치 배분 방식을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미국은 ‘통제’보다 ‘탈중앙화의 조건’을 묻고 있었다

밀러 화이트하우스-레빈 솔라나 정책연구소 대표의 발표는 한국과 미국의 규제 철학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줬다.

그는 미국 의회에서 논의돼 온 CLARITY Act와 GENIUS Act를 중심으로 미국 디지털자산 규제의 흐름을 설명했다.

핵심은 미국이 디지털자산을 일률적으로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산과 네트워크를 증권 규제와 상품 규제, 지급결제 규제 안에 배치할 것인지 구체화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밀러 화이트하우스-레빈(Miller Whitehouse-Levine) 솔라나 정책연구소(Solana Policy Institute) 대표가 미국의 디지털자산 시장 구조와 스테이블코인 규제 동향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오승환/토큰포스트)]

프로젝트 초기에는 특정 발행 주체와 개발팀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공시와 투자자 보호 의무를 강화한다. 그러나 네트워크가 충분히 분산되고 특정 주체의 통제에서 벗어나면 규제 부담을 조정할 수 있다는 접근이다.

밀러 대표는 공개성, 무허가성, 분산성, 자율성, 경제적 독립성 등을 탈중앙화 판단의 주요 기준으로 설명했다.

누구나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는가. 특정 관리자의 허가 없이 거래와 검증에 참여할 수 있는가. 소수 주체가 거래를 중단하거나 원장을 변경할 수 있는가. 프로토콜이 특정 기업의 지속적인 지원 없이도 운영될 수 있는가.

이 같은 질문은 탈중앙화를 단순한 기술적 구호가 아니라 규제상 판단 가능한 기준으로 만들려는 시도다.

한국이 주로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를 묻는다면 미국은 “특정 주체가 통제하지 않아도 신뢰를 유지하는 시스템은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가”를 함께 묻고 있었다.

탈중앙화금융(DeFi)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됐다. 특정 중개기관이 고객 자산을 보관하거나 거래를 임의로 통제하지 않고 공개된 코드에 따라 프로토콜이 작동한다면, 전통 금융기관과 동일한 규제를 그대로 적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물론 ‘탈중앙화’라는 이름만으로 규제를 피할 수는 없다. 개발팀이 관리자 키를 보유하고 거래를 중단하거나 자산을 동결할 수 있다면 실질적으로는 중앙화된 서비스일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명칭이 아니라 통제권이 실제로 누구에게 있는가다.

[밀러 화이트하우스-레빈 솔라나 정책연구소 대표가 증권의 발행·유통을 퍼블릭 블록체인 기반으로 구현하는 미국의 규제 방향과 ‘Project Open’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오승환/토큰포스트)]

시장이 묻는 것은 ‘누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다

거시적 비전과 입법 방향이 제시됐지만 시장의 질문은 훨씬 현실적이다. 김효봉 법무법인 태평양 파트너 변호사의 발표는 이 지점을 정확히 짚었다.

그는 한국 디지털자산 입법의 핵심이 결국 라이선스 체계라고 설명했다.

김효봉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가 토큰증권(STO)과 디지털자산에 적용되는 법률 및 규제 쟁점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오승환/토큰포스)

은행은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증권사는 어떤 방식으로 디지털자산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가. 카드사와 전자금융업자는 스테이블코인 결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가. 핀테크 기업은 어떤 조건으로 발행과 유통, 수탁과 결제에 참여할 수 있는가.

시장 참여자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법안의 선언적 방향보다 실제 수행할 수 있는 업무의 범위다.

디지털자산 산업에서는 발행과 교환, 중개와 매매, 보관과 이전, 결제와 정산이 하나의 서비스 안에서 결합된다. 반면 기존 금융법은 은행업과 금융투자업, 전자금융업과 가상자산사업을 서로 다른 인허가 체계로 구분한다.

이 때문에 사업자는 하나의 라이선스로 충분한지, 여러 업권의 인가를 동시에 받아야 하는지, 기존 금융회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특히 스테이블코인 결제 서비스는 전자금융거래법과 디지털자산기본법이 동시에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 결제 요청을 처리하는 행위는 전자금융의 영역이지만, 정산 과정에서 스테이블코인을 보관하거나 이전·교환한다면 가상자산사업자 규제가 적용될 수 있다.

하나의 서비스에 복수의 인허가가 요구되는 이른바 ‘듀얼 라이선스’ 문제다.

김 변호사는 명확한 가이드가 없으면 사업자들이 내년도 사업계획과 투자계획조차 세우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법이 통과된다고 시장이 곧바로 열리는 것은 아니다. 시행령과 감독규정, 라이선스 심사 기준, 준비자산 인정 범위, 이용자 자산 분리 기준이 구체화돼야 기업이 자본과 인력을 투입할 수 있다.

제도화의 속도만큼 예측 가능성이 중요한 이유다.

한국 STO는 왜 ‘비유동성 자산’에 머무는가

STO에 대해서도 중요한 문제 제기가 나왔다.

미국과 독일 등 해외 시장에서는 주식과 채권, 펀드, 머니마켓펀드(MMF), 국채 같은 기존 정형증권을 블록체인 위에서 발행하고 유통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 경우 토큰화의 목적은 없던 자산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금융상품의 발행과 결제, 이전과 담보 설정, 권리 행사를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데 있다.

반면 한국의 STO 논의는 그동안 미술품과 한우, 부동산과 지식재산권 등 조각투자형 자산과 투자계약증권, 비금전신탁수익증권을 중심으로 진행돼 왔다.

김 변호사는 “왜 우리는 비유동성 자산만 토큰화하려 하는가”라고 물었다.

유동성이 부족한 자산을 잘게 나눈다고 해서 자동으로 거래가 활성화되는 것은 아니다. 기초자산의 가치평가가 어렵고 거래 수요가 제한적이라면 토큰화 이후에도 유동성은 부족할 수 있다.

오히려 토큰화의 장점은 이미 거래 수요와 가격 형성 구조를 갖춘 정형증권에서 먼저 나타날 수 있다. 주식과 채권, 펀드 지분을 블록체인 기반으로 발행하면 거래시간을 확대하고 결제 주기를 단축하며 소유권 이전과 배당·이자 지급을 자동화할 수 있다.

토큰화의 본질은 유동성이 없는 자산을 억지로 거래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기존 금융자산의 발행과 유통, 결제 구조를 효율화하고 서로 다른 시장을 연결하는 데 있다.

한국의 STO 제도 역시 조각투자 시장을 넘어 기존 자본시장 인프라의 혁신으로 확장돼야 한다.

이제 쟁점은 토큰증권을 허용할 것인가가 아니다. 어떤 분산원장 인프라를 인정하고, 발행인 계좌관리기관과 증권사, 예탁결제원과 장외거래소의 역할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다.

토큰화의 핵심은 ‘자산’보다 ‘유통 레일’이다

이날 발표들을 종합하면 RWA와 STO의 경쟁력은 어떤 자산을 토큰화하느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실물자산을 블록체인에 기록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금융상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해당 자산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 법적으로 소유권이나 수익권이 연결돼야 하며,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이 보관과 평가를 담당해야 한다.

무엇보다 투자자가 필요할 때 사고팔 수 있는 유통시장과 결제 인프라가 있어야 한다.

결국 토큰화 시장의 핵심은 ‘토큰’보다 유통 레일이다. 발행과 공시, 가치평가와 수탁, 거래와 결제, 상환이 하나의 구조로 연결돼야 한다.

이 레일을 누가 먼저 만들고 국제 표준으로 확장하느냐가 앞으로 디지털자산 시장의 주도권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현장에서 확인한 변화, 그리고 남은 질문

이번 심포지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스테이블코인이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가장 강하게 남은 단어는 ‘설계’였다.

디지털자산을 허용할 것인지 금지할 것인지의 단계는 지나가고 있다. 이제 문제는 누가, 어떤 책임을 지고, 어떤 규칙과 인프라 위에서 시장을 만들 것인가다.

국회는 법을 준비하고 있다. 산업계는 국가 전략을 이야기하고 있다. 해외 정책 전문가들은 탈중앙화와 토큰화 자본시장의 조건을 설명했다. 법률 전문가들은 라이선스와 시행령, 준비자산과 STO 구조의 현실적 문제를 지적했다.

각자의 언어는 달랐지만 방향은 하나로 모였다.

디지털자산 규제와 자본시장 구조 개편을 주제로 열린 정책 심포지엄에서 국내외 정책·법률·시장 관계자들이 발표를 경청하고 있다. (사진=오승환/토큰포스트)

디지털자산은 더 이상 주변부의 투기적 자산이 아니다. 지급결제와 자본시장, 콘텐츠와 AI, 제조업을 연결하는 미래 산업 인프라의 일부로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고 제도화가 산업의 성공을 자동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폐쇄적인 발행 구조는 은행 중심의 과점을 만들 수 있다.

반대로 진입 규제를 과도하게 낮추면 준비자산 부실과 상환 불능 위험이 커진다. 제도가 늦으면 기업과 인재가 해외로 빠져나가지만, 충분한 안전장치 없이 시장을 열면 그 위험은 이용자가 떠안게 된다.

한국의 과제는 규제와 혁신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신뢰와 혁신이 함께 작동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준비자산과 상환청구권을 보장하면서도 다양한 사업자가 혁신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STO는 조각투자를 넘어 기존 증권시장의 발행·유통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확장돼야 한다. RWA 역시 자산의 토큰화뿐 아니라 가치평가와 수탁, 법적 권리와 유통시장까지 함께 설계해야 한다.

AI 에이전트 경제도 먼 미래로만 남겨둘 수 없다. AI가 계약과 결제의 주체가 된다면 책임 소재와 신원 확인, 거래 한도와 오류 발생 시 구제 절차까지 새롭게 논의해야 한다.

행사를 마치고 해시드 라운지를 나서는 길, 머릿속에 남은 단어는 ‘골든타임’이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인프라와 이용자 기반, 제조업과 콘텐츠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제도 설계가 늦어지면 우리가 가진 기술과 콘텐츠, 인재와 시장은 다른 나라가 만든 플랫폼과 결제망 안에서 소비될 수 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디지털 결제의 표준이 되고 해외 플랫폼이 RWA와 토큰증권 유통망을 선점한 뒤에는 국내 제도를 정비하더라도 시장의 중심을 되찾기 쉽지 않다.

반대로 지금 제대로 설계한다면 스테이블코인과 RWA, STO, AI 에이전트 경제는 한국의 새로운 성장축이 될 수 있다.

수십 년 전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했을 때도 많은 사람은 그것을 기존 카메라를 대체하는 새로운 기계 정도로 바라봤다. 그러나 디지털은 사진만 바꾼 것이 아니라 제작과 전송, 유통과 소비의 질서 전체를 바꿨다.

지금의 디지털자산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스테이블코인은 시작일 뿐이다. 그 뒤에는 금융과 산업, 콘텐츠와 국가 경쟁력의 새로운 질서가 다가오고 있다.

한국은 디지털자산 시장의 규칙과 인프라를 직접 설계하는 국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나라가 만든 규칙과 플랫폼 위에서 서비스를 공급하고 소비하는 국가로 남을 것인가.

이날 현장에서 느낀 것은 기대감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설렘과 함께, 우리가 또 한 번 결정적인 시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었다.

그 선택의 시간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아니다.

이미 시작됐다.

본 기사는 시장 데이터 및 차트 분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에 대한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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