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 오른 사람들은 정장 차림이었다. Web3 행사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다. 핵심 시간대의 단상에 선 발표자들만은 하나같이 슈트를 입고 있었다. 6월 초 뉴욕 맨해튼 Javits Center에서 3일간 열린 ETHConf 2026 New York을 직접 참관하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풍경이다.
ETHConf는 이더리움 생태계의 해커톤·개발자 행사를 오랫동안 운영해 온 ETHGlobal이 처음으로 기관·제도권 금융을 정면에 내건 컨퍼런스다. 행사장은 월스트리트가 자리한 맨해튼,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BlackRock 본사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SEC 현직 인사와 전(前)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의장이 단상에 올랐고, 미국 자본시장의 결제·예탁 중추인 DTCC, 뉴욕증권거래소(NYSE)와 손잡은 기업의 경영진이 차례로 마이크를 잡았다. 후드티 사이에 정장이 섞인 이 풍경 자체가, 개발자의 마당이던 이더리움에 월스트리트가 들어왔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행사 직전 ETHConf 공식 계정은 「Top Companies Attending」으로 참가 기업을 소개했는데, a16z·Mastercard·Coinbase와 함께 DSRV의 이름도 그 명단에 있었다. 한국 기업으로서는 드문 자리였다.
지난 몇 년간 업계의 화두는 "전통 금융이 과연 블록체인을 도입할 것인가"였다. 그러나 현장에서 확인한 것은, 그 질문이 이미 지나간 질문이라는 사실이었다. 월스트리트는 도입을 저울질하는 단계를 지나, 이미 그 위에서 자산을 토큰화하고 자본을 조달하며 전통 금융사와 격차를 벌리기 시작했다. 질문은 '할 것인가'에서 '얼마나 빨리, 누가 먼저인가'로 바뀌어 있었다.
규제: “소송의 시대는 끝났다”
첫날, 가장 사람이 몰린 시간대의 무대에 SEC 인사가 올랐다. 이더리움 행사에서 규제 당국자의 세션이 가장 붐빈다는 것부터가 이 행사의 성격을 말해주는 장면이었다.
세션이 시작되자 모더레이터가 농담처럼 운을 뗐다. 그 역시 SEC를 거쳐 지금은 블록체인 기업의 법률총괄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당신이 SEC에서 DeFi를 제일 잘 아는 두 번째 사람이죠 — 첫 번째는 저고요."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규제하는 쪽과 규제받는 쪽을 오간 두 사람이 이더리움 무대에 나란히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규제기관과 업계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음을 어떤 설명보다 분명하게 보여줬다.
농담이 걷히자 메시지는 선명해졌다. SEC 디지털자산 태스크포스(Crypto Task Force)의 수석 자문은 "소송을 통한 규제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고 말했다. 사후에 소송으로 제재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제는 온체인 자본시장의 규칙을 함께 세우고 받아들이는 시대라는 것이다. 퍼블릭 블록체인을 규제의 대상이 아니라 도로나 전력망 같은 '중립적 인프라(neutral infrastructure)'로 본다는 표현, 규제의 초점이 기술 자체나 초기 빌더들의 절차적 실수(foot faults)가 아니라 실질적인 금융 사기로 좁혀졌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는 일회성 발언이 아니다. SEC는 2025년 디지털자산 태스크포스를 출범시키고 '프로젝트 크립토(Project Crypto)'를 통해 과거의 소송 중심 규제와 결별을 선언했으며, 2026년에는 CFTC와 공동 가이던스를 내놓아 비트코인·이더리움 등 주요 토큰을 '디지털 상품'으로 예시했다. 무엇보다 미국은 2025년 7월 결제용 스테이블코인을 규율하는 GENIUS Act를 발효시키고, 2026년 7월 시행규칙·2027년 1월 전면 시행이라는 일정을 법에 못 박아 두었다. 규제가 '의지'가 아니라 '캘린더'가 된 것이다.
별도 세션에 오른 전 CFTC 의장 — '크립토 대디(Crypto Dad)'로 불리는 인사 — 는 디지털 달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전 세계 GDP의 1~2%가 단순히 돈을 옮기는 데만 소모된다"는 표현을 한 세션에서 두 번이나 반복했다. 강조하고 싶은 숫자가 분명했다. 규제 당국이 빗장을 풀자, 그 위에서 기관 자본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717경 원의 결제망이 온체인으로 간다
규제가 멍석을 깔았다면, 그 위에서 가장 무겁게 움직인 주체는 DTCC다. DTCC는 2025년 한 해 자회사들을 통해 약 4.7 quadrillion 달러(약 717경 원) 규모의 증권 거래를 처리하고 약 114조 달러어치 증권을 수탁한, 사실상 월스트리트의 심장이다. 미국에서 거래되는 거의 모든 주식이 이 파이프라인을 통과한다. 골드만삭스·JP모건 같은 금융기관들이 공동으로 소유한 협동조합이자, 미국 금융 시스템의 핵심 인프라로 지정된 기관(SIFMU·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시장 유틸리티)이기도 하다(미국의 예탁결제원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 DTCC가 SEC의 무조치 의견서(No-Action Letter)를 받아, 보관 중인 미국 국채·Russell 1000 주식·주요 지수추종 ETF를 블록체인상 토큰으로 표현하는 3년 파일럿에 착수했다. 일정은 2026년 7월 제한적 운영, 10월 본격 출범으로 이미 못 박혀 있고, BlackRock·Goldman Sachs·JPMorgan·Citi 등 50개가 넘는 기관이 참여한다. 핵심은 새로운 시장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DTCC를 통과하는 기존 증권 자체를 온체인으로 옮긴다는 데 있다.
이를 통해 현재 T+1(거래 다음 날) 결제를 원자적(atomic) 결제에 가깝게 단축하고, 주식·ETF·국채를 묶은 통합 담보 처리와 24시간·연중무휴 담보 이동을 지향한다(초기 파일럿은 온체인 '표현' 단계이며, 즉시 결제는 단계적으로 실현할 목표다). 인상적이었던 건 단어였다. 717경 원을 굴리는 기관의 최고기술책임자(CTO)가 무대에서 "담보 이동성이야말로 킬러 앱(killer app)"이라고 말했다. 크립토 업계의 용어를, 월스트리트 인프라의 심장이 자기 말처럼 쓰고 있었다. DTCC가 월스트리트 금융기관들의 연합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DTCC의 결정은 곧 월스트리트의 의지로 읽힌다.
주식이 '토큰'이 되는 인프라도 이미 완성 단계다. 토큰화 인프라 기업 Securitize의 CEO는 NYSE와 손잡고 미국 상장사 주식을 블록체인 위에서 직접 발행·관리하는 인프라를 두고, "구축한다(build)"가 아니라 이미 "구축했다(built)"고 과거형으로 말했다. 2026년 3월 NYSE·모회사 ICE와 양해각서를 맺어 '최초의 디지털 명의개서대리인'으로 지정됐고, 7월 초에는 자사 주식 일부를 토큰으로 거래하는 시범을 직접 보일 예정이다.
그는 현재 300억 달러대인 온체인 실물자산(RWA·스테이블코인 제외) 시장이 토큰화 주식·ETF를 통해 5조 달러까지 커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전 세계 주식·ETF 시장(약 150조 달러)의 2~3%만 온체인으로 옮겨 와도 도달하는 숫자다. 한 발표자의 낙관만은 아니다. Citi는 2026년 6월 보고서에서 토큰화 증권 시장이 2030년까지 기본 시나리오 5.5조 달러(범위 2.7조~8.2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발행사와 투자은행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월가가 뛰어든 이유: 조달금리 2.1%포인트
월스트리트는 왜 블록체인으로 뛰어드는가. 현장에서 들은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돈이 되기 때문이고, 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때문이다.
가장 선명한 사례는 미국 비은행 주택담보대출(HELOC) 1위 기업 Figure의 발표였다. Figure는 대출 재원을 은행에서 빌릴 때(이날 세션에서는 골드만삭스를 콕 집어 언급했다) 약 6.5%의 금리를 부담했지만, 조달 경로를 이더리움 기반 탈중앙 금융(DeFi)으로 옮겨 약 4.4% 수준까지 낮췄다고 밝혔다. 경쟁사가 6.5%로 조달하는 동안 Figure는 4.4%로 조달하기 시작한 것, 약 2.1%포인트의 차이다.
차이의 핵심은 자금의 '출처'에 있다. 미국의 한 은행이 아니라 아시아·중동을 포함한 전 세계의 유동성이 한 시장에 모이고, 중개 단계가 얇아진 만큼 금리가 내려간다. 그리고 이 격차는 한 번의 차이로 끝나지 않는다. 더 싸게 조달한 곳이 더 많은 대출을 일으키고, 더 큰 유동성 풀이 다시 금리를 끌어내린다. 관망하는 1~2년 사이, 격차는 따라잡기 어려운 폭으로 벌어진다.
2.1% 금리 차이라면 돈이 DeFi에서 왔거나 아니거나 중요하지 않다. 돈이 되면 하는 곳이 월스트리트의 문법이다.
그런데 왜 이더리움인가
자산이 옮겨가고 자본이 흐르기 시작하면, 다음 질문은 "어디로"다. 기관 간 대규모 정산 논의에서 사실상 표준으로 거론된 것은 이더리움이었다. 한 인프라 기업 창업자는, 월가 기관 간의 진지한 인프라 논의에서 이더리움 이외의 레이어1은 사실상 거론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더리움 진영에 선 인사의 평가라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그 근거는 새겨들을 만했다. 처리 속도가 가장 빨라서가 아니라, 기관이 자산을 올려두는 기준인 신뢰성·중립성·검증 가능성을 가장 두텁게 충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프라의 성숙도 빠르게 확인됐다. 개발자들이 가장 빽빽하게 들어찬 세션은 영지식증명(ZK) 기반 거래소 Lighter였다. 정장과 후드티가 같은 행사장에서 각자 다른 무대로 몰려가는 풍경이었다. Lighter는 선입선출(FIFO) 처리를 ZK로 증명해 새치기성 매매(프런트러닝)를 원천 차단하면서도, 중앙화 거래소에 가까운 사용자 경험을 수백 밀리초대 속도로 구현한 사례를 보여줬다. '되긴 되나' 싶던 기술이 실거래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3일간의 세션을 정리하니 하나의 순서가 보였다. 규제가 길을 열고, 자산이 올라타고, 자본이 더 싼 곳으로 흐르고, 그 모든 것이 이더리움으로 수렴한다. 이 네 단계가 곧 '이주'의 경로였다.
한국은 무엇을, 얼마나 빨리 준비해야 하는가
미국은 이 변화를 '올해 하반기'라는 일정표 위에 올려놓았다. DTCC가 7월·10월을 못 박았고, Securitize는 인프라를 이미 구축했으며, Figure는 더 싼 금리로 이미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추상적인 미래가 아니라 가동되는 현재다. 미국은 캘린더를 들고 있고, 한국은 아직 질문을 들고 있다.
앞서 본 이주는 규제 → 자산 → 자본 → 인프라 네 단계로 진행됐다. 같은 네 축에 한국을 비춰 보면 빈칸이 드러난다.
- 규제에서 미국이 GENIUS Act로 스테이블코인의 법적 지위를 확정했다면, 한국은 디지털자산·스테이블코인 법제를 정비하는 단계다.
- 자산에서 DTCC·NYSE가 하반기 상용화를 예고했다면, 한국은 토큰증권(STO)을 '발행'에서 '유통'까지 끌어올릴 실행력을 확보해야 한다.
- 자본에서 글로벌 유동성이 더 싼 조달 경로를 찾아 온체인으로 모이는 동안, 원화 기반 유동성은 그 무대에 아직 오르지 못했다.
- 인프라에서 정산의 표준이 이더리움으로 수렴하는 동안, 한국의 예탁·결제·지갑 인프라는 이제 온체인 대응을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국가 차원의 담론이기 이전에 개별 기관의 손익 문제다. 토큰화 결제망이 표준이 되면, 온체인 조달·정산 경로를 갖추지 못한 금융사는 더 비싼 자금과 더 느린 결제로 경쟁하게 된다. STO 유통 인프라를 먼저 갖춘 증권사와 그렇지 못한 증권사의 격차는, 현장에서 본 Figure와 그 경쟁사 사이 2.1%포인트와 같은 성격의 격차다. 처방은 진단만큼 분명하다. 발행에 앞서 유통·담보·합성을 함께 설계하고, 새 시장을 따로 만들기보다 기존 예탁·결제망 자체를 온체인으로 옮기되 그 위에서 자산을 누가 안전하게 수탁하고 검증할지를 같은 자리에서 정해야 한다.
3일간 행사장을 돌며 가장 마음에 걸린 것은 통계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중국에서 온 참가자는 눈에 띄게 많았지만, 한국인은 좀처럼 마주치기 어려웠다. 월스트리트의 변화가 시작되는 자리에 한국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이, 그날 들은 어떤 수치보다 무겁게 다가왔다.
행사장에서 한 블록 거리에는 BlackRock 본사가 있었다. 그 건물이 상징하듯, 맨해튼은 고여서 움직이지 않는 자본을 본능적으로 견디지 못하는 곳이다. 자산이 토큰화되고 자본이 온체인으로 이동할수록, 결국 경쟁의 본질이 되는 것은 누가 그 흐름을 끊김 없이 운영하고, 자산을 안전하게 수탁하며, 거래를 검증 가능하게 만드느냐다. 화려한 응용 서비스의 이면에서, 이주는 신뢰할 수 있는 기반 인프라 위에서만 완성되기 때문이다.
ETHConf 2026 New York이 확인시켜 준 것은, 이더리움의 가장 정확한 쓰임새가 결국 '금융'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금융의 무대가 뉴욕에서 온체인으로 옮겨 가는 현장을 3일간 지켜봤다. 질문은 이미 '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먼저인가'다. 한국과 한국 기업은 이 이주의 관찰자로 남을 것인가, 참여자가 될 것인가 — 그리고 참여한다면, 그 인프라를 누구와 함께 세울 것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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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광 | DSRV 이사·공동창업자. DSRV는 블록체인 인프라 전문 기업으로 노드·밸리데이터 운영, 자산 수탁(custody), 결제·지갑 인프라 등 온체인 금융의 기초 계층을 제공한다.
본 글은 ETHConf 2026 New York 현장 참관 기록과 공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한국어판·영문판 심층 리포트 「월스트리트, 이더리움이라는 신대륙으로 이주하고 있다」는 'dsrv.com'에서 볼 수 있으며, 본 주제에 관한 발표·자문 문의는 [email protected]으로 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