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의 외국산 전력망 장비 규제가 미국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에서 한국 배터리 기업의 입지를 시험하는 새 변수로 떠올랐다. 배터리 에너지저장장치(BESS)가 규제 대상에 포함되면서 중국산 장비 의존도가 높은 북미 ESS 공급망이 조정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박진수 신영증권 연구원은 28일 보고서에서 “이번 행정명령은 미국의 대중 견제 기조가 구체적 규제로 현실화한 것으로, 국내 배터리 밸류체인 입장에서는 반사 수혜가 강화될 수 있는 환경”이라고 말했다. 다만 실제 영향은 미국 에너지부의 후속 규정과 현지 생산 요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간) 국가 전력망 보호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백악관은 외국산 전력 시스템 장비가 미국 안보와 경제에 비정상적이고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행정명령은 에너지부 장관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외국산 벌크 전력 시스템 장비의 취득, 수입, 이전, 설치를 금지할 수 있도록 했다. 적용 대상에는 원자로, 커패시터, 변압기, 계통 연계 인버터, 배터리 에너지저장장치, 무정전전원공급장치, 발전기와 관련 소프트웨어, 펌웨어, 원격접속 기능, 유지보수 서비스가 포함됐다.
벌크 전력 시스템은 대규모 발전·송전 설비와 이를 제어하는 장비를 포괄하는 전력망 체계다. ESS는 전기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공급하는 장치이고, BESS는 배터리를 활용한 ESS를 뜻한다. 전력 수요가 늘어나는 환경에서는 발전 설비만큼 저장장치와 계통 연계 장비의 안정성도 중요해진다.
이번 명령은 특정 국가를 직접 명시하지 않았다. 다만 신영증권은 이번 조치가 중국산 전력 장비를 겨냥한 규제로 해석될 수 있다고 봤다. 백악관도 외국 행위자가 미국 전력망 장비의 취약점을 만들거나 악용할 수 있다는 점을 국가비상사태 선포의 근거로 들었다.
박 연구원은 2026년 상반기 북미 ESS 배터리 설치량이 전년 동기 대비 83% 늘었다고 짚었다. 국가별로는 중국 점유율이 76%로 높았고, 한국 기업 점유율은 20% 안팎에 머물렀다고 분석했다.
신영증권은 한국 기업 점유율이 제한된 배경으로 충분하지 않은 현지 생산능력을 들었다. 박 연구원은 “한국 배터리 업체들이 아직은 충분한 현지 생산능력을 갖추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신영증권은 LG에너지솔루션(373220)과 삼성SDI(006400) 등 한국 배터리 셀 기업이 올해 연말까지 합산 90GWh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출 것으로 봤다. 박 연구원은 생산 확장이 본격화되면 한국 기업의 미국 BESS 시장 점유율이 내년부터 올라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번 사안은 단순한 관세 문제가 아니라 전력망 안보 문제로 다뤄진다는 점에서 기존 ESS 공급망 논의와 결이 다르다. 지금까지는 중국산 ESS 배터리에 대한 관세와 현지 보조금이 한국 기업의 가격 경쟁력 요인으로 거론됐다.
신영증권은 앞으로 전력망 안보를 명분으로 한 중국산 BESS 차단 기조가 별도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박 연구원은 BESS 하위 소재·부품도 장기적으로 탈중국 밸류체인 전환 흐름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 경우 한국 기업에는 셀 생산능력뿐 아니라 미국 현지 공급망을 얼마나 갖췄는지가 관건이 된다. 배터리 셀, 양극재, 냉각 시스템, 부품 기업까지 ESS 밸류체인 전반이 정책 변화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평가다.
다만 행정명령만으로 특정 기업의 점유율 변화가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에너지부가 어떤 장비와 공급업체를 위험 대상으로 판단할지, 이미 설치된 장비에 어떤 조건을 붙일지가 실제 시장 영향의 핵심이다.
본지는 앞서 외국산 대규모 전력망 장비 거래에 대한 미국의 규제 절차를 보도했다. 당시 명령문에는 암호화폐 채굴이 직접 규제 대상으로 적시되지 않았지만, 전력망 장비 조달과 공급망 검증이 대형 전력 수요 산업에 간접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행정명령은 에너지부 장관이 120일 안에 관련 규정이나 시행 규칙을 마련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 적용 범위와 대상 기업은 에너지부의 후속 판단에 따라 정해질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