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설계의 복잡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인공지능(AI) 기반 솔루션이 각광받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버라에 본사를 둔 반도체 AI 스타트업 칩에이전츠(ChipAgents.ai)는 반도체 설계 및 검증을 자동화하는 ‘에이전틱 AI(agentic AI)’ 플랫폼을 앞세워 2,100만 달러(약 302억 4,000만 원)의 시리즈A 자금을 유치했다.
이번 투자는 베세머 벤처 파트너스가 주도했으며, 전략적 투자자로 마이크론 테크놀로지(MU), 미디어텍, 에릭슨 등이 이름을 올렸다. 기존 투자자인 ScOp 벤처 캐피털과 아미노 캐피털도 후속 투자를 이어가며 칩에이전츠의 누적 투자액은 2,400만 달러(약 345억 6,000만 원)에 달하게 됐다.
칩에이전츠 창업자이자 CEO인 윌리엄 왕(William Wang) 교수는 “현재 반도체의 논리게이트 수는 수십억 개를 넘어 조 단위에 육박한다”며, “이같은 복잡성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에, 코드 수준에서 정확한 구현을 위한 검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칩에이전츠는 기존 전자설계자동화(EDA) 도구를 보완하는 역할로, 설계 사양 정의부터 RTL(레지스터 전송 수준) 코드 생성, 문서 자동화에 이르기까지 칩 설계 초기 단계의 작업을 AI로 자동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거 캐던스 디자인 시스템, 시놉시스 같은 기업들이 시뮬레이션 기반 설계를 개척했다면, 칩에이전츠는 이 흐름을 최신 AI 기술로 확장하고 있다.
이 회사가 제공하는 플랫폼의 핵심 기능은 ‘검증’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반도체 산업은 생산 이후 오류 수정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특성 때문에, 개발 단계에서의 기능 검증(FV)이 제품 성공의 핵심이다. 왕은 “칩 설계자는 몇 명이지만 함수 검증 엔지니어는 그보다 2~3배 많아야 한다”며 “칩에이전츠는 테스트 벤치와 규칙, 어서션(assertion) 생성을 자동화해 검증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킨다”고 말했다.
수백 페이지에 이르는 사양 문서를 일일이 확인하고 일관성을 점검하던 작업도 AI가 맡는다. 플랫폼은 이질적인 문서 간 내용 불일치나 설계 오류 가능성을 빠르게 분류하고, RTL 코드를 기반으로한 동작 흐름까지 파악해 오류를 사전에 제거할 수 있도록 돕는다.
특정 고객사를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왕은 전 세계 상위 20위권 반도체 기업 다수가 이미 칩에이전츠를 도입해 사용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2024년 설립 이후 플랫폼 사용량은 불과 6개월 만에 60배 이상 증가하는 등 업계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이번 투자 유치를 계기로 칩에이전츠는 실리콘밸리 중심부인 산타클라라에 본사를 새로 마련하고 고객 대응 역량도 강화할 계획이다. 기존 연구개발센터는 산타바버라에 유지하며 핵심 기술 개발을 이어간다. 베세머 벤처 파트너스의 란스 코 팅 케(Lance Co Ting Keh) 파트너는 “칩에이전츠는 명확한 사양 정의부터 파형 분석에 이르기까지 칩 설계 전반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AI 접근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칩에이전츠의 기술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한 자동화 수준을 넘어, 칩 설계자의 의도를 능동적으로 학습하고 실행 가능한 결정을 지원하는 점에 있다. 설계 주기의 효율성은 물론, 미래 반도체 산업의 속도와 품질 관리 방식까지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AI가 반도체 개발의 전 과정에 본격적으로 침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신호탄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