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화 지배력은 지정학 충격과 디지털자산 확산을 함께 반영한 스트레스테스트에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이클 보르도(Michael D. Bordo) 럿거스대 경제학과 교수와 세실 바스티동(Cécile Bastidon) 툴롱대 수석 연구원은 미국 전미경제연구소(NBER) 2026년 8월 워킹페이퍼에서 국제통화시스템의 지배 통화가 바뀌는 조건을 모형화했다. 논문 제목은 ‘Currency Dominance Is Not Forever: Some Insights from a Non-Linear Dynamic Model’이다.
연구진은 고전적 금본위제 이후 현재까지의 국제통화 체제를 바탕으로 스트레스테스트를 설계했다. 대상은 달러화와 파운드화, 유로화, 엔화, 루블화, 위안화, 스위스프랑화, 루피화, 디지털자산 등 9개 기준 통화였다.
충격 변수는 △기술 변화 △개발과 자원 접근성 변화 △통화·금융·재정 제도 변화 △민주주의와 주요 분쟁을 포함한 지정학 요인 △규제 환경 변화 등 5개 범주로 나뉘었다. 연구진은 이를 조합해 유로화에 유리한 경우, 달러화에 유리한 경우, 신흥국 통화에 유리한 경우, 선진국 통화에 유리한 경우를 각각 점검했다.
핵심 결론은 달러화의 관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달러화 시스템의 회복력과 구심력이 입증됐다”고 밝혔다. 여러 충격이 동시에 발생해도 지배 통화 교체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디지털자산도 판을 바꾸는 변수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연구진은 “스테이블코인과 같은 디지털 자산의 확산도 결과를 바꾸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다른 통화가 달러화를 대신해 핵심 지배 통화로 부상한 시나리오도 없었다는 것이다.
국제통화시스템에서 지배 통화는 단순히 결제에 많이 쓰이는 통화를 뜻하지 않는다. 무역 결제, 외환보유액, 국제 금융시장 조달, 안전자산 수요가 함께 얽힌 중심 통화의 지위를 말한다. 한 번 형성된 지위는 네트워크 효과와 금융시장 깊이 때문에 쉽게 바뀌지 않는 구조다.
한국 독자에게 이 대목은 외환시장과 암호화폐 시장을 함께 보는 기준점이 된다. 스테이블코인은 통상 달러화 표시 자산과 결제 수요를 기반으로 움직인다. 디지털자산 사용이 늘어도 달러 체제 밖의 독립 통화권이 자동으로 커진다는 뜻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유로화는 달러화의 가장 강한 후계 후보로 거론됐다. 다만 연구진은 유로화가 달러화 지위를 넘어서려면 유럽연합(EU)의 완전한 재정·금융 통합뿐 아니라 군사·외교 통합까지 필요하다고 봤다. 통화의 지배력은 결제 편의나 시장 규모만으로 정해지지 않고 제도, 안보, 금융시장 신뢰가 함께 작동한다는 의미다.
이는 유로화의 한계를 단순한 경제 규모 문제로만 보지 않는 접근이다. 유로존은 공동 통화를 쓰지만 재정과 국방, 외교 의사결정은 국가별 이해가 남아 있다. 연구진의 모형은 이런 제도적 조건이 국제통화 질서의 전환 속도에 영향을 준다고 본다.
최근 원화가 달러화 대비 반등한 흐름도 개별 통화의 단기 움직임에 가깝다. 이번 논문이 다룬 것은 환율 등락이 아니라 국제통화시스템 안에서 어느 통화가 중심축 역할을 하느냐다.
외환시장에서 특정 통화가 강세를 보이는 일과 국제통화 체제의 중심이 바뀌는 일은 구분해야 한다. 단기 환율은 금리 차, 무역수지, 자금 흐름, 위험선호에 따라 움직인다. 반면 지배 통화의 전환은 결제망과 금융시장 신뢰, 제도적 기반이 함께 바뀌어야 가능한 문제다.
암호화폐 시장에서도 같은 구분이 필요하다. 디지털자산과 스테이블코인은 결제와 송금, 온체인 금융에서 사용 범위를 넓혀 왔지만, 이번 연구는 그 확산만으로 달러화 중심 질서가 대체되지는 않는다고 봤다.
연구진의 결론은 달러화 약세나 대체 통화 논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여러 충격을 동시에 넣어도 지배 통화 교체가 제한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비선형 동태 모형으로 제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