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스테이블코인은 새로운 페트로달러다…한국은 어떤 질서를 만들 것인가

1970년대, 미국은 전 세계 석유를 ‘달러로만’ 사고팔도록 만들었다. 이른바 페트로달러(Petrodollar) 체제다. 석유를 수입하려면 달러가 필요했고, 그 달러는 반드시 미국 금융 시스템을 거쳐야 했다. 미국은 이 구조를 통해 돈의 흐름을 지배했고, 청산 주권(clearing sovereignty)을 기반으로 군사력보다 강력한 경제 패권을 구축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번엔 석유가 아니라 스테이블코인이 중심이다. 미국은 이 흐름도 놓치지 않았다. 최근 상원을 통과한 ‘GENIUS Act’는 스테이블코인을 공식 제도권으로 편입하면서, 발행 요건으로 미국 국채 보유를 의무화하고 연준의 감독 하에 두도록 했다. 이는 디지털 시대의 달러 패권을 재설계하려는 시도이자, 청산 구조를 미국 자본시장에 결박시키려는 정교한 전략이다. 시장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단기 미국 국채 수요를 끌어올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민간도 움직였다. 세계 최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테더(Tether)는 최근 자체 블록체인 Plasma와 Stable을 출범시켰다. 기존에는 이더리움, 트론 등 외부 체인을 통해 수수료와 청산이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수수료, 유통, 결제 전 과정을 자체 네트워크에서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테더는 소매(Plasma), 기업(Stable), 미국 특화형 체인까지 준비하며 모든 수수료 관문을 직접 통제하려 한다. 국가는 제도를, 민간은 인프라를 설계하며 디지털 청산망의 주도권 경쟁이 본격화된 것이다.

이미 글로벌 민간기업들이 청산 주권을 장악하기 위한 체인 질서를 짜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여전히 실험과 규제의 프레임에만 갇혀 있다면 글로벌 디지털 금융 질서에서 변방으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단순히 기술을 따라가는 것으로는 영향력을 확보할 수 없다. 진짜 경쟁은 누가 구조를 설계하느냐에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이 가진 독자적 강점도 있다. 바로 K-콘텐츠다. 음악, 드라마, 게임, 웹툰 등 한국의 문화산업은 세계 소비자들의 일상 속에서 가치를 창출하고 있으며, 글로벌 디지털 플랫폼에서 수익을 실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문화적 영향력을 넘어 디지털 경제에서 ‘청산 가능한 자산(Clearing Asset)’으로 기능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K-콘텐츠는 석유처럼 소비되며, 그 결제는 디지털로 이루어진다.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페트롤, 소프트파워 (Soft Power) 기반의 통화 질서 재편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단순히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거나 CBDC 실험을 하는 수준을 넘어, 누가 결제의 마지막 경로를 통제하고 수수료를 걷는지, 즉 누가 청산망을 설계하는지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외국 체인 위에 올려진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우리 것이 아닌 생태계 안에 갇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조심스럽게 하나의 제안도 가능하다.

향후 남북 협력 또는 통일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서로 다른 통화 체제와 법률 제도를 연결할 중립적인 디지털 스테이블코인이 필요할 수 있다. 어느 한쪽의 제도만 따르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이고 투명한 청산 수단이 있다면, 남과 북은 그 공통 통화 위에서 새로운 경제 질서를 설계할 수 있다. ‘통일 코인’은 감정이 아닌, 기술 기반의 실용적 시도일 수 있다.

지금 미국은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구조를 설계하고 있다. 테더는 자체 인프라를 통해 민간이 직접 청산의 권한을 가져가고 있다. 한국도 더 이상 기술을 따를 것이 아니라,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질서와 권력의 경로다. 이 흐름을 놓치는 국가는 디지털 패권 질서에서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질서를 만들 것인가. 지금은 따라가는 나라가 아닌, 설계하는 나라가 되어야 할 때다.